碩 士 學 位 論 文

指導敎授 許 捲 洙

  

 

退庵 權重道의 生涯와 詩世界

The Study on Toeam Kwon-jungdo's Life and Poetic World

 

   

 

 

慶 尙 大 學 校 大 學 院

漢 文 學 科

權 道 漢

2011. 8.

碩 士 學 位 論 文

指導敎授 許 捲 洙

 

 

 

退庵 權重道의 生涯와 詩世界

The Study on Toeam Kwon-jungdo's Life and Poetic World

 

 

 

 

이 論文을 文學碩士

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慶 尙 大 學 校 大 學 院

漢 文 學 科

道 漢

2011. 8.

 

 

權 道 漢의

文學碩士 學位 論文을 認准함

   

 

 

慶 尙 大 學 校 大 學 院

2011. 8.

 

차 례

ABSTRACTⅰ

Ⅰ. 서론1

1. 연구 목적1

2. 연구 방법2

Ⅱ. 생애와 학문3

1. 家系3

2. 修學過程6

1) 葛庵 李玄逸 師事 6

2) 교우 관계 8

3) 南冥의 영향11

3. 인품과 기질13

4. 학자적 면모16

1) 성리학자적 면모16

2) 문학적 자질20

3) 유림에서의 역할20

Ⅲ. 시 세계24

1. 󰡔퇴암집󰡕의 구성24

2. 시 개관25

3. 憂患意識27

4. 勸學과 自適36

5. 자연친화41

6. 惜別의 情懷53

Ⅳ. 퇴암시의 특징60

Ⅴ. 결론65

참고문헌68

* 부록 󰡔퇴암집󰡕 수록 시문 목록69

ABSTRACT

 

The Study on Toeam Kwon Jung-Do's Life and Poetic World

 

Kwon, Do-Han

 

Department of Korea Classics in Chinese

Graduate School of Gyeongsang National University

Jin-ju, Korea

Supervised by professor Heo, Gwon-Su

 

Kwon Jung-Do(1680-1722) with pen name Toeam is a scholar who acted during the reign of Joseon dynasty king Sukjong. Having started to learn XiaoXie a entry-level Neo-Confucianism book for young children at age 8, he reached profound depth in academic accomplishments by reading JingShiZiJi extensively already at age 16.

At age 18, he became a pupil of Lee Hyeon-Il of pen name Galam who was in exile in Gwangyang by visiting him, and his study gained further development by receiving his instruction. Toeam had uncommon love and respect for his teacher, and such sense of respect continued through his life.

Toeam's sense of filial duty also was unusual. When his father passed away at his age 29, he never took any water or condiments in his mouth, and toiled his body by lying on fire wood, nearly lost his life.

Toeam was in a place to lead studies in the social community of East Gyeongsang province then in the 1st half of the 18th century. After discussing with Toeam on various theories on li and qi 'vital force and principle' Lee Man-Bu of pen name Shiksan evaluated that he is well worthwhile to be counted as the suzerain master of Confucianism in East Gyeongsang province in appreciation for his breath and depth of study, highly appreciating his literary accomplishments in neo-Confucianism.

Toeam served as the principal of Deokcheon Confucian School which deserves to be considered as the mecca of Confucianism in that area, and won a literary reputation by writing 「Gyeonguidang Jungsugi, The Chronicle of Building Gyeongui Hall」 the auditorium of Deokcheon Confucian School at the tender age of 23.

Toeam faithfully followed the academic tradition that spanned from Toegye to Galam, and was highly evaluated on his literary qualities among the various pupils of Galam.

Toeam's poetry collection includes many poems that set the inner agony to images. Such agonies were not out of his own private matters but were the concerns about the social problems -- an aspect that allows a peep into his sense of social responsibility as intellectual. Toeam's poetry includes ones that recommend academic pursuit and encourage younger students, many of which reflect his leisurely mind-set and academic quality. Also his collection of poetry includes many poems that depict enjoyment of natural beauty, seeking of mind stability in that and cultivation of mind and heart, which reflect his quality as forest scholar.

Toeam's poems include no such ones that are striving only to fit into a form. Many outstanding expressions of poetic phrases are found in his works from place to place, verifying then evaluation of his works that they are outstanding in literary qualifications.

Toeam Kwon Jung-Do was a scholar who considered wealth and fame as a dust and ashes by staying away from worldly reputation and lived a lofty life by pressing on in academic study all his life. Lee Bok-Hwan of pen name Nogye said that he consider it regretful as a younger scholar that Toeam, when he could have stood high in academic circle if he ever could live a little longer, could not exert his academic competence properly by passing into next world at the young age of only 43.

 

Ⅰ. 서론

1. 연구 목적

權重道(1680-1722)는 조선 숙종 때 사람으로, 자는 汝行이고 호는 退庵이다. 어려서부터 성질이 온유하고 돈후하였으며, 어른이 권하지 않아도 매일 자신의 과업을 정하여 스스로 공부하고, 공부를 마친 다음에야 다른 일을 하였다. 어린 나이에 학업의 열정이 이러하니, 후일 성취하는 바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고 주변에서 칭찬하였다. 8세에 󰡔小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6세에는 이미 經史子集을 두루 섭렵하여 학문이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18세에는 葛庵 李玄逸의 문하에 들어가 교도를 받아 학문이 한 단계 더 발전하였다.

어느날 息山 李萬敷는 퇴암과 이기론을 논하고서 경상우도의 儒宗이라 할 만하다고 하여, 퇴암의 학문적 역량을 높이 평가한 적이 있다. 그리고 23세의 젊은 나이에 德泉書院의 「敬義堂重修記」를 썼으며, 남명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덕천서원의 院任을 역임하여, 이 지역 학문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퇴암이 평생 추구한 길은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키며 함양하고 사색하는 것이었다. 퇴암도 한 때는 과거를 통하여 관계에 진출하려는 뜻이 있었다. 그러나 스승이 사후에도 집권 세력의 방해로 명예회복이 좌절되는 상황을 보고는 정치에 환멸을 느껴 과거를 포기하였으며, 세상의 영욕에서 벗어나 일생 동안 오직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다. 이렇게 일생을 살아간 퇴암은 무엇을 노래하였으며, 그 시에는 어떠한 내용이 담겨 있는지 연구하고 싶었다.

퇴암은 문학에 남다른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金聖鐸은 당시 갈암의 문도들 중에서 ‘여행’이 문학에서로 가장 뛰어났다’고 밝힌 바 있으며, 李栽는 여행의 文詞가 典雅하다고 자주 칭찬하였다. 문학을 본격적으로 수업하고 연마하지 않았지만, 쟁쟁한 문도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문학 작품은 작가의 삶이 총체적으로 반영된 결과이다. 이렇게 문학적 재능을 가졌다고 주변에서 인정한 퇴암이 창작한 시들의 문학적 실체를 이 연구를 통하여 규명하고자 한다.

2. 연구 방법

퇴암은 지금과의 시대적 거리가 300년 가까이 된다. 퇴암의 시를 연구하기 위한 자료로는 작가가 남긴 문집이 유일하다. 그 외에 따로 구전하거나 다른 문헌으로 전하는 작품은 없다.

문집 󰡔퇴암집󰡕에는 모두 41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작품은 이 41수가 전부이다. 학자로서 시 창작을 중시하지 않았다는 시대 상황을 감안하여도 작품 수가 매우 적은 편이다.

문학 작품은 작가의 삶이 총체적으로 반영된 산물임과 동시에 그 자체로서 하나의 유기적 구조물이다. 따라서 이러한 대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작품을 산출한 작가의 삶을 총체적으로 연구하여야 함과 동시에 작품 자체로서의 내부적 구조도 면밀하게 검토하고 연구하여야 한다. 따라서 먼저 퇴암의 생애와 학문을 고찰하고, 다음 41수의 작품을 모두 구체적으로 분석하기로 한다.

퇴암의 생애와 학문은 家系, 修學過程, 인품과 기질, 학자적 면모로 나누어 고찰하기로 한다. 퇴암에게 영향을 크게 미친 사람으로는 먼저 아버지와 스승 葛庵을 들 수 있다. 그 외에 갈암 문하에서 만난 여러 士友들도 퇴암의 학문에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본다. 그리고 퇴암이 성장한 지역은 조선 중기 이후 南冥 曺植의 학문적 영향이 지대하였다. 이 지역에서 생장하고 활동한 퇴암은 당연히 남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하여 수학과정은 다시 葛庵 李玄逸 師事, 교우 관계, 南冥의 영향으로 나누어 고찰하기로 한다. 인품과 기질에서는 부모와 스승을 어떻게 섬겼으며, 가난한 생활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중심으로 고찰하기로 한다. 퇴암은 성리학 연구에 노력하였으며, 문학적 자질을 가진 인물로 주변에서 인정하였고, 당시 유림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면면을 보아서 학자적 면모는 성리학자적 면모, 문학적 자질, 유림에서의 역할로 나누어 고찰하기로 한다.

시 분석은 내부 구조를 중심으로 하되, 필요한 경우 작가와 연계하여 분석한다.

Ⅱ. 생애와 학문

1. 家系

退庵 權重道는 1680년(숙종 6년) 4월 16일 경상도 단성현 元塘洞에서 출생하였다. 원당동은 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원당인데, 속칭 감나무지[柿亭村]라고도 한다. 본관은 안동이고, 安分堂 權逵(1496-1548)의 6세손이다.

안분당 권규는 南冥ㆍ退溪와 道義之交를 맺은 선비였다. 단성현 원당동에 정착하면서 별도의 집 한 채를 지어서 ‘安分’이라는 편액을 붙이고, 벽에는 邵康節의 ‘安分吟’ 절구 한 수를 써서 걸어 둠으로써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퇴암은 안분당에 대한 숭모의식이 남달랐다. 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않으면서 학문연구에만 진력하였던 퇴암의 행적은 안분당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종5대조 源塘 權文任(1528-1580)은 안분당의 3남으로 남명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藝文館 檢閱을 지냈다. 49세에 급제하여 53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역량을 제대로 펴 볼 기회도 잡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사람들이 안타까워하였다. 德溪 吳健과 도의지교를 맺었으며, 󰡔源塘文集󰡕이 있다.

5대조 權文彦(1530-1592)은 안분당의 4남으로 효행이 뛰어났다. 효행으로 通政大夫 工曹參議에 贈職되었다.

從高祖 源堂 權濟(1548-1612)는 안분당의 장손으로 남명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立齋 盧欽에게서도 배웠다. 4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忘憂堂 郭再祐와 함께 창의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禮曹佐郞, 古阜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權洚(1564-1628)은 仲父 권문임의 후사를 이었는데, 생부 권문임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갈라 피를 흘려 넣어서 소생시킨 고사가 있다. 효자가 대를 이은 것이다. 갈암이 지은 墓表가 있다.

종고조모 晉陽 姜氏는 權文彦의 장자부인데, 정유재란 때 왜적의 난을 만나, 목숨을 바쳐 절의를 세운 행적이 널리 알려져 국가에서 정려를 세웠다. 이 정려는 지금도 경남 산청군 단성면 입석리 마을 어귀에 서 있다.

퇴암의 아버지는 晩悟齋 權德輝(1653-1708)이고 어머니는 장수 황씨이다. 만오재는 아들 4명을 두었는데, 퇴암은 그 중 장남이다.

퇴암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아버지이다. 아버지 만오재는 학문 연마에 노력하였으며, 성격이 강직하고 호방하여,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부합되면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유배당한 인사들을 만났다. 또 남을 돕기를 좋아하여,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자신의 처지를 잊고 도왔다.

만오재는 원당동에 정자를 짓고 晩悟齋라 이름하며 거기에서 침식을 잊을 정도로 경전과 여러 선현의 글을 읽었는데, 특히 寒岡 鄭逑의 󰡔疑禮問答󰡕을 가장 좋아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성격이 강직하여 세류에 부화뇌동하지 못한다.”고 하였고,

“자신을 다스리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어찌 남을 책할 겨를이 있겠는가? 매일 나 자신이 남에게 잘못이 없는가를 반성한다. 이미 자신이 바르게 되었다면 남에게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창졸간에 당하는 급한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대부분 당황하고 근심하지만, 만오재는 그런 일에 부딪쳐도 여유가 있어 목소리나 얼굴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만오재에게 상의하였고, 만오재는 또 충심을 다하여 부탁하는 사람의 일을 도모하였다.

남이 어렵게 사는 이야기를 들으면 말 곡식을 아끼지 않았으며, 남이 굶주리는 것을 보면 거친 밥이라도 반드시 나누어 먹었다. 1697년에 갈암이 위리안치에서 풀려나 전라도 光陽으로 귀양지를 옮겼다. 갈암은 당시 퇴계 학문의 적통자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만오재는 광양으로 갈암을 직접 찾아가 여러 가지 의문 사항을 묻고 학문적 지도를 받은 뒤, 당시 18세였던 장자 퇴암을 갈암 문하에서 수학하게 하였다. 또 고성에 귀양 중인 李雲徵을 방문하였다. 이운징은 1694년 甲戌煥局 당시 전라감사에 재직하다가 노론에 의해 삭탈관직 당하고, 고성으로 귀양을 간 인물이다. 이운징의 형 李義徵은 형조판서로 재직 중 삭탈관직 당하여 사사되었다. 말하자면 이운징 집안은 당시 권력을 잡은 노론 세력에게 철저하게 응징당한 인물들이었고, 이러한 인물을 찾고 교유한다는 것은 특별한 신념이나 가치관을 가지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었다. 1698년에는 합천에 들러 敬庵 文東道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여러 사람을 만나고는 “몸 밖의 득실은 본디 분수 안의 일이 아닌데, 어찌 관심을 둘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드디어 과거를 사절하고, 자연을 벗하면서 살았는데, 이러한 삶의 자취는 李栽가 만오재에게 써준 「蘆峴八詠」에 잘 드러나 있다. 노현은 원당동에 있는 蘆山 고개를 말한다.

이상 퇴암의 가계를 살펴보았다. 6대조 안분당 권규는 남명ㆍ퇴계와 도의지교를 맺은 선비로서, 퇴암은 안분당에 대한 숭모의식이 남달랐다. 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않으면서 학문연구에만 진력하였던 퇴암의 행적은 안분당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버지 만오재는 퇴암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만오재는 학문 연마에 노력하였으며, 성격이 강직하고 호방하여,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부합되면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유배당한 인사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남을 돕기를 좋아하여,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자신의 처지를 잊고 도왔다.

家 系 圖

 

 

 

 

 

 

 

 

 

 

 

 

 

 

 

 

 

 

 

 

安分堂

 

 

延日

鄭氏

 

 

 

 

 

 

 

 

 

 

 

 

 

 

 

 

 

 

 

 

 

 

 

 

 

 

 

 

 

 

 

 

 

 

 

 

 

 

 

 

 

 

 

 

 

 

 

 

 

 

 

 

 

 

 

 

 

 

 

 

文顯

 

 

 

文箸

 

文任

 

 

 

文彦

 

 

 

 

 

 

 

 

 

 

 

 

 

 

 

 

 

 

 

 

 

 

 

 

 

 

 

 

 

 

 

 

 

 

 

 

 

 

 

 

 

 

 

 

 

 

 

 

 

 

 

 

 

 

 

 

 

 

 

 

 

 

 

 

 

入系

 

 

 

 

出系

 

 

 

 

 

 

 

 

 

 

 

 

 

 

 

 

 

 

 

 

 

 

 

 

 

 

 

 

 

 

 

 

 

 

 

 

克泰

 

 

 

 

 

 

 

 

 

 

 

 

 

 

 

 

 

 

 

 

 

 

 

 

 

 

 

 

 

 

 

 

 

 

 

 

 

 

 

 

 

 

 

 

 

 

 

 

 

 

 

 

 

 

 

 

 

 

 

 

 

 

 

 

 

 

 

 

 

 

 

 

 

 

 

 

 

 

 

 

 

 

 

 

 

 

 

 

 

 

 

 

 

 

 

 

 

 

 

 

 

 

 

 

 

 

 

 

 

 

 

 

 

 

 

 

 

 

 

 

 

 

 

 

 

 

 

 

 

 

 

 

 

 

 

 

 

 

 

 

 

 

 

 

 

德輝

 

 

長水

黃氏

 

德章

 

 

 

 

 

 

 

 

 

 

 

 

 

 

 

 

 

 

 

 

 

 

 

 

 

 

 

 

 

 

 

 

 

 

 

 

 

 

 

 

 

 

 

 

 

 

 

 

 

 

 

 

 

 

 

 

 

 

 

 

 

 

 

 

 

 

 

 

 

 

 

 

重道

退庵

 

 

載寧

李氏

 

重和

 

 

 

重遠

 

 

 

重呂

 

 

 

 

안분당 이후 퇴암까지의 가계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2. 修學過程

1) 葛庵 李玄逸 師事

퇴암은 18세 때 함경도 鐘城에서 전라도 광양으로 移配되어 온 葛庵 李玄逸(1627-1730)을 찾아가 문하생이 되기를 청하였다. 그의 뜻을 가상하게 여긴 갈암은 먼저 󰡔논어󰡕를 공부하게 하고, 이어 다른 경전을 배우게 하였는데, 窮理修身의 실무를 알아서 실천하도록 하여, 교도를 받은 지 수년 만에 학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 뒤 갈암이 유배에서 풀려나 안동 錦陽으로 돌아간 뒤에도 5백리 길을 자주 왕래하며 학문 연찬에 힘썼다.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 갑술환국 때 쫓겨난 사람들에게 다시 위해를 가하는 사건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서 갈암이 어떻게 처신하였는가를 퇴암은 「錦陽記善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생 또한 왕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느긋하게 처신하고 근심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지 않았더냐? 死生禍福이 운명 아닌 것이 없다고. 운명을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하셨다. 그때 대간의 상소가 번갈아 나와 날로 더욱 위태롭고 두렵게 되었음을 알려왔다. 문하생들은 학도들을 흩어 보내고 문을 닫아 강학을 폐지할 것을 청하였더니, 선생께서는 “옛날 朱선생께서 僞學의 당파를 금하던 시기에 놀라운 일의 발생이 긴박하게 곧 닥칠 때에도 강학을 그치지 않았는데, 나 역시 지금 어떻게 강학을 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스승의 이러한 삶의 자세를 목격한 퇴암은 선비가 고난에 처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체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퇴암이 일생 동안 몹시 가난하게 살면서도 의연하게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승의 이러한 삶의 자세에 영향을 받은 힘도 있었을 것이다. 인용문에서 ‘옛날 朱선생께서 僞學의 당파를 금하던 시기’라고 한 것은 주자가 당시 송나라 조정에 있는 韓侂胄의 간악함을 비판한 적이 있었는데, 후에 한탁주가 높이 등용되자 원한을 품고 주자와 그의 문인들에게 僞學黨이라는 죄목을 붙여 온갖 박해를 가한 사건을 말한다. 「금양기선록」의 금양은 갈암이 귀양에서 풀려나 만년에 강학하던 지명인데, 지금의 안동 부근이다. 퇴암이 이곳에서 가르침을 받으면서 선생의 언행을 기록하여 모은 저서가 「금양기선록」이다.

갈암은 제자를 가르치면서 학문적 성취뿐만 아니라 인격적 도야를 매우 중시하였다. 특히 사람을 대할 때에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위엄을 앞세우지 않고 따뜻하고 부드럽게 타일러서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스승을 매우 존경한 퇴암은 자연히 갈암의 이러한 교육을 깊이 내면화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금양기선록」에 실려 있는 몇 가지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중도가 선생을 뵈려고 들어가는 도중에 선생을 면담하고 나오는 승려를 만났다. 승려가 절을 하는데 중도는 인사에 대한 답도 하지 않고 들어갔다. 선생께서 이를 책망하시기를

“옛날 程子 문하의 학도들이 절에 도착하였는데, 소상을 등지고 앉게 되자 의자를 돌려서 등지지 않게 하였다. 비록 사람의 형상을 갖춘 것도 오히려 공경하는 마음을 바치고 거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하물며 사람이 앞에서 절을 하는데, 어찌 오만함이 이와 같을 수 있느냐?”

라고 하셨다.

(2) 선생께서는 노복도 같은 백성임을 강조하면서 따뜻하게 대할 것을 강조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공자께서 ‘백성을 부릴 때는 제사를 받드는 것 같이 한다’고 하셨다. 무릇 사람의 집에 부리는 노복의 무리 또한 백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릇 사람들은 노복을 부릴 때 제사를 받들 때와 같이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납게 굴고 성내며 꾸짖어서 억제하여 조절하지 못한다. 만약 이 때에 통렬히 스스로 경계하고 책하여, 말을 따뜻하게 하고 기색을 온화하게 하여 비루하고 어그러진 행동을 멀리하면, 이 또한 경을 지키는 한 가지 일이다.”

라고 하셨다.

(3) 문하생들이 󰡔논어󰡕 ‘互鄕章’을 함께 질문하였는데, 선생께서 반복하여 알아듣도록 가르치고 나서

“성인께서 교훈을 세우신 것이 진실로 이와 같으니, 깨우치고 책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라고 강조하셨다. 중도는 물러나와 땀을 흘리고 등을 적셨지만 그 까닭을 잘 알지 못했는데, 한참 지낸 뒤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일찍이 시비를 논평할 적에 실수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향장’은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글이다. 호향 사람들은 함께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인데, 공자가 그곳의 한 아이를 만나자 제자들이 의아스럽게 생각하였고, 공자가 그 아이를 만난 배경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곧 교육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면 출신 성분이나 과거의 경력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기회를 주겠다는 내용이다. 어쨌든 위의 글 (3)에서 퇴암은 스승으로부터 호향장의 가르침을 받고 물러나와 등을 적실 정도로 땀을 흘리며 자신의 지난 행동을 후회하였다. 선생의 이러한 가르침이 내면화되어 퇴암은 끝없는 인격 도야를 하였다.

2) 교우 관계

갈암 사후 정신적 지주를 잃은 퇴암은 누군가 자신을 이끌어줄 지도자가 필요하였다. 갈암의 아들 李栽(1657-1730)는 자가 幼材이고 호가 密庵인데 퇴암이 갈암의 문하를 드나들면서 익히 서로 잘 알게 된 사이였다. 그리고 이재는 갈암의 아들이기 이전에 현명한 후계자로서 학술과 덕망이 한 세대의 중진이 되기에 충분하였으며, 아버지 만오재와도 친밀한 사이였다. 퇴암은 이재를 찾아가 여러 날 이야기를 나누고서 옛 예법을 따라 스승으로 섬기고자 하였더니, 이재는

“사양하겠네. 그대가 나에게는 형제의 의리가 있는 사람인데, 어찌 규제하고 경계하는 바를 힘쓰라고 일컬을 수 있겠는가? 남을 타이르는 것은 옛 군자의 후덕한 기풍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라고 하면서 극구 사양하였다.

퇴암은 申益愰(1672-1722)을 존중하였다. 신익황은 자가 明仲이고 호는 克齋이며 갈암의 제자이다. 󰡔克齋文集󰡕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7세 때 광양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갈암을 찾아가 처음 대면한 이후 갈암으로부터 학문적 지도를 받았다. 퇴암이 갈암의 문하에 입문한 것도 광양에서였으니, 퇴암과 신익황은 광양에서부터 서로 아는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신익황은 퇴암보다 8세 연장이다. 퇴암은 신익황을 연장자로서 존중하고 학문적으로 매우 신뢰하였으며, 의문이 있는 사항은 문의하여 자기 심화의 방편으로 삼았다. 다음의 두 편지를 보면 신익황에 대한 퇴암의 믿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날 함양에 대한 이야기는 모르겠습니다만 다시 기억해 두었다가 또 서울에 있는 여러 친구들과 더불어 토론한 바 있었는지요?, 어리석은 저의 견해로는 오래도록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申明仲 형에게 여러 번 서신을 왕복한 지금에야 견해가 일치되었습니다.”

 

“대체로 기질의 性은 陰靜에 속하고, 기질의 情은 陽動에 속한다는 것은 본디 극재의 설인데, 제가 이것을 보고 지나치게 믿고서 몹시 좋아한 것입니다.”

 

金聖鐸(1684-1747)은 자가 振伯이고. 호가 霽山이다. 󰡔霽山集󰡕 등 다수의 저서가 있고, 조야에 널리 알려진 학자였다. 퇴암보다 4세 연장이며, 갈암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이다. 󰡔퇴암집󰡕의 「序文」과 「墓碣銘」을 쓰는 등 퇴암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퇴암과 인간적으로 오래 교유한 사람들로는 진주의 曺錫基(1667-1724), 창원의 金尙鼎(1668-1747), 밀양의 安命夏(1682-1752) 등을 들 수 있다.

조석기는 자가 德甫이고. 호는 募溪이며. 퇴암보다 13세 연장이다. 김상정은 자가 德三이고 호가 谷川이며. 퇴암보다 12세 연장이다. 안명하는 자가 國華이고, 호가 松窩이며 퇴암보다 2세 연하이다. 그러니 조석기와 안명하는 15살의 나이 차이가 났다. 그래도 이들은 갈암의 같은 문하생이라는 학연에, 같은 경상우도 출신이라는 지연이 어울려 오랫동안 서로 친밀한 교분을 지켜왔다. 김성탁이 쓴 󰡔퇴암집󰡕 서문에는 네 사람의 우의가 돈독했음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진양의 曺德甫, 회산의 金德三, 丹丘의 權汝行, 밀성의 安國華는 뜻을 돈독히 하고 학문을 좋아한다고 특별히 일컬어졌으며, 또한 교유하며 왕래하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

 

그 외에 魯溪 李復煥, 聾窩 李寅煥과의 교유를 통하여 학문을 더욱 심화하였고, 龍岡 黃壽一, 梅溪 姜汝寬, 珠潭 金聖運, 息山 李萬敷 등과도 심도 있는 학문적 논의를 하였다.

이복환은 자가 來卿이고 호는 魯溪이다. 갈암의 손자이고, 이재의 조카이며, 李寅煥의 종형이다. 이인환은 李之煇라고도 하는데, 갈암의 손자이며, 이재의 3남으로, 자가 韜仲이고 호는 聾窩이며, 이복환의 종제이다. 이복환과 이인환은 모두 갈암의 손자로 퇴암과는 연령도 비슷하여 인간적인 교분이 두터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 글은 이복환이 퇴암을 그리워하며 쓴 만장이다. 종제 이인환과 함게 퇴암을 찾아와서 같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며 학문적 토론을 하였던 추억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작년 겨울 나는 종제 도중과 일 때문에 남쪽으로 내려가 汝行과 여러 날 노닐면서, 고금의 일을 부지런히 드나들면서 의심나고 어려운 문제를 토론하였다. 돌아와서 여행은 또 편지로 다시 전에 논한 내용을 자세히 써서 보냈는데, 천여 자 정도 되었다. 이기의 원리를 추구하여 밝히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여행을 볼 수 없으니, 이것은 너무나 무겁고 고통스럽구나.

 

황수일(1666-1725)은 갈암의 제자이다. 자가 用五이고 호는 龍岡이며, 󰡔龍岡集󰡕이 있다. 퇴암보다는 12세 나이가 많았으나, 다 같이 갈암의 문하생으로서 학문적으로 깊은 연대감을 가졌을 것이다. “기품 가운데에서 본성을 발라내면, 사단도 칠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황수일의 주장에 대해 퇴암이 반론을 전개하는 등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학문적 토론이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강여관(1669-1715)은 자가 君平이고 호는 梅溪이며, 진주 사람으로 역시 갈암의 가르침을 받았다. 퇴암보다 11세 연장이지만 동문수학한 연대감과 지역적으로 가까운 여건 등으로 인하여 서로 가까웠다. 퇴암이 강여관을 위해 쓴 제문이 있다.

김성운(1673-?)은 자가 大集이고 호는 珠潭이며. 퇴암보다 7세 연장으로 하동 북천 사람이다. 동문수학한 사이는 아니지만 남명을 존경하는 공통점을 가진 데다 지역적으로도 생활 근거지가 가까워 자연스럽게 교유하였다. 많지 않은 퇴암의 시 가운데 김성운의 시를 차운한 시가 2수이며, 남명의 󰡔학기󰡕, 󰡔연보󰡕 등의 문제로 서로 진지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등 편지 3편이 󰡔퇴암집󰡕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친분이 매우 두터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만부에 관해서는 다음 ‘학자적 면모’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3) 南冥의 영향

퇴암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역 사회의 선배 학자에 대한 관심이 결코 적지 않았다. 특히 南冥 曺植에 대한 존경과 관심은 지대하였다. 비록 두 사람의 시대적 간격은 100년이 넘지만 남명이 남긴 학문적 영향은 퇴암 때에도 적지 않았다. 퇴암이 덕천서원 원임을 역임하고, 덕천서원의 「경의당중수기」를 쓴 것도 남명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1703년 23세에 쓴 덕천서원의 「경의당중수기」에서

 

…… 우리 노선생은 이미 敬義로써 지나간 성인이 전하지 않은 단서를 이어 갔으며, 또 이것으로 후학을 힘써 나아가게 하였으니, 敬義를 새긴 편액이 어찌 벽 위에 걸어두고 보는 데 그칠 따름이겠는가? 장차 이것으로써 남기신 가르침을 밝혀서 무궁하게 후학을 가르칠 것이니, 이 堂에 기거하는 사람들 또한 힘쓰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하였다. 또 김성운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남명의 󰡔學記󰡕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두고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남명 선생의 󰡔學記󰡕에 ‘無極은 형이상이고, 太極은 형이하이다’라고 하신 것에 대해서는 과연 의문이 없을 수 없습니다.……󰡔학기󰡕는 본디 선생이 독서하실 때 메모한 것이니, 반드시 이런 근거 없는 말을 기록해서 후학의 의심을 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전사할 때 잘못한 오류를 이어받아 답습하면서, 사람들이 살피지 못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선유의 말에 ‘태극은 형이상이요, 음양은 형이하이다’라고 하였는데, 저는 이 말로 보아, (학기에서 말한) 무극은 태극의 잘못이고, 태극은 음양의 잘못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학기󰡕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에 대해서 이러한 진단을 내린 것은 평소 남명에 대한 퇴암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기록되어 있는 내용만을 가지고 잘못된 점을 비판한 것이 아니고, 오류의 원인에 대한 해석을 통하여 학문에 대한 객관성과 선현의 입장을 동시에 살리고 있다.

또 김성운은 󰡔남명연보󰡕를 편찬하면서 裵紳(1520-1573)이 쓴 행장은 수록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唐虞를 노래하고 三代를 그리워하며 휘파람 불었다’고 하는 말이 다른 사람들의 글에는 실려 있지 않으니, 사실에 대한 신빙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서 퇴암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선생께서 보배로운 뜻을 품고 고상하게 은둔하여 비록 세상에 뜻이 없는 것 같아도, 태평성대로 돌아가게 하려는 뜻은 마음속에 정성스럽게 간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끔 노래하고 휘파람 부실 때가 있어서, 주선생께서 취하여 「離騷」를 읽고, 胡致堂이 취하여 「出師表」를 노래한 것과 같은 점이 있으니, 강개하고 격렬한 뜻을 백년 뒤에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주자가 취하여 「이소」를 읽고, 胡寅이 취하여 「출사표」를 노래하였듯이, 고통 받는 백성을 걱정하였던 선생 또한 ‘당우를 노래하고 삼대를 그리워하며 휘파람 불었다’고 하는 말이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남명의 행적을 주자나 호인과 동격에 둠으로써 퇴암의 남명에 대한 흠모의 정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상 ‘수학 과정’을 고찰하였다. 18세에 갈암을 찾아가 문하생이 되었고, 교도를 받은 지 수년 만에 학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퇴암은 갈암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학문의 발전 못지않게 인격적 감화를 많이 받았고, 이러한 감화는 이후 퇴암의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퇴암은 지역의 대선배 학자인 남명 조식의 학문적 영향도 크게 받았다.

퇴암이 교유한 인물로는, 밀암 이재, 극재 신익황, 제산 김성탁, 모계 조석기, 곡천 김상정, 송와 안명하, 노계 이복환, 농와 이인환, 용강 황수일, 매계 강여관, 주담 김성운, 식산 이만부 등이 있었다.

3. 인품과 기질

퇴암은 어렸을 때 동지가 되면 아우들과 함께 놀이를 꾸며서 부모를 기쁘게 하였으며, 매일 새벽이면 아버지를 따라 가묘에 배알하는 등 의례 거동이 공손하고 단아하여 주위 사람들이 모두 “어린 나이에 배움의 정도가 이러하니 다른 날 그가 성취할 정도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이다.”라고 칭찬하였다.

퇴암은 효행이 남달랐다. 아버지의 상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이러한 효행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퇴암은 1708년(숙종34년) 29세에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물과 장을 입에 넣지 않고 섶에 누워 몸을 훼손하면서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이렇게 되니 퇴암의 어머니는 장자를 잃게 될 것을 걱정하여, 자신도 식음을 전폐하였고, 어머니의 이러한 행동에 놀란 퇴암은 어머니를 위하여 억지로 죽을 마시었다. 상례를 치르면서 생사의 갈림길에 설 정도였음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어떠하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

조선 시대의 사회에서는 관혼상제의 어느 하나도 소홀하게 여길 수 없는 의례였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상례는 선비가 가져야 할 행실의 중요한 척도였다. 거상을 마친 뒤 퇴암은 세상일에 뜻을 접고 오직 어머니를 봉양하고 독서하는 일에 힘을 썼다.

갈암은 정치적 파란에 휩싸여 고초를 심하게 겪은 인물이다. 1694년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갑술환국 때 趙嗣基를 신구하다가 함경도 洪原縣으로 유배되었고, 다시 서인 安世徵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圍籬安置되었다. 1697년에는 처벌이 조금 완화되어 호남의 광양으로 유배지가 바뀌었는데, 퇴암은 이 때 갈암을 찾아 배움을 청하였고, 이후 한결같이 스승으로 섬겼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인심은 세력이 있는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당시의 정치적 판도로 보아 집권 세력의 심한 핍박을 받았던 갈암 문하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험난한 길을 동행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그리고 이런 험난한 길에 동행하고자 한 점에서 퇴암의 구도 정신이 얼마나 간절한가를 알 수 있으며, 좌고우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1704년(숙종 30년) 25세에 갈암이 세상을 떠났을 때, 퇴암은 스승을 잃은 심정을 심장과 창자가 꺾이고 터질 지경이라고 하여, 부모를 잃은 자식의 심정으로 슬픔을 토로하였다. 퇴암은 신위를 마련하여 곡하고 복을 입었으며, 3년 동안 심상을 다하였다.

이렇게 퇴암은 스승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이 남달랐으며, 이러한 존경심은 일생을 이어갔다. 갈암 사후에도 갈암의 학문을 계승 발전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스승의 견해를 시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동문수학한 사람이라도 논리가 스승의 견해에서 벗어난다고 판단되면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황수일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잘 볼 수 있다.

퇴암은 1722년(경종 2년) 43세에 갑자기 천연두를 만나 증세가 매우 위독하자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 나이 이미 40을 넘겼으니 죽어도 섭섭할 것이 없지만, 다만 연로하신 어머니 봉양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마음 아프고 한스러울 뿐이다. 너희들은 힘써 학업을 폐하지 말라.

 

라고 하면서 3월 17일에 삶을 마감하였다. 삶을 마감하는 자리에서도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는 불효를 걱정하였으며, 여러 아들에게 학업에 힘쓰라고 당부하였다. 부모에 대한 효심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어떠하였는가를 집작하게 한다.

퇴암이 남긴 글을 보면 몹시 가난하게 살았음을 알 수 있다. 󰡔退庵集󰡕 1권에 수록된 작품 「아이가 개 한 마리를 얻어서 길렀는데, 다음 해 여름에 집안이 가난한 탓으로 먹일 것이 없어 개를 사육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개를 내보냈는데, 오히려 주인을 그리워하여 가지 않고, 밤에는 사립문을 지키고서 짖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느낀 바가 있어 이 글을 지었다」는 특별히 긴 제목을 가진 시를 보면, 퇴암의 생활이 어떠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퇴암은 질병 때문에 고통을 겪는 내용이 교유한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 속에 자주 나오는데, 이러한 생활은 가난도 큰 이유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병고를 이기지 못하고 일찍 타계한 것도 가난한 생활이 한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가난을 입에 올려서 생활을 비관하거나 한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앞에서 인용한 시도 어쩔 수 없어서 개를 기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노래하였지 개를 키우지 못하는 가난을 탓하는 노래가 아니었다.

퇴암은 자녀 교육을 하면서 가난을 극복하고 학업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상황보다 더 험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선인들의 사례를 말하면서 공부할 것을 당부하였다. 가난은 결코 학업을 중단하는 핑계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다음 글은 퇴암이 아들에게 학업을 당부하는 내용이 담긴 글이다.

 

고인은 옥중에 있으면서도 책을 받아 배우고, 배 가운데에서도 강학을 하였으니, 감옥과 배의 걱정스럽고 위태로운 상황은 오늘날의 우환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데도, 오히려 책을 배우고 강학을 한 것은 학업은 하루도 폐할 수 없고 도는 잠시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직 너희들은 이를 본받아 우환으로 말미암아 힘써야 할 공부를 폐하지 아니하기를 바란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을 공경함은 당시 사회의 선비들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이었다. 퇴암은 이러한 덕목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리고 가난에 굴하지 않고 학문에 진력한 학자로서의 의연한 모습에서, 평소 자기 수행과 연마에 얼마나 철저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자기 수행과 연마에 치열했던 모습은 「퇴암기」에서 평생 세상의 영욕을 멀리하고 오직 정신 수양에 노력하며, 천명을 즐기고 분수에 만족하여 유유자적한 삶을 살겠다고 한 말이나,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는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서, 공명을 뜬 구름같이 여기며 이것이 자신의 삶에 누가 되는 일이 없이 살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일생을 살아간 데서도 잘 드러나 있다.

이상 살펴본 사실들은 퇴암의 일상생활이 사회 규범에 충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깨끗하게 살아간 일생은 사회 정화의 귀감이 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규범적 행동은 학자로서의 위상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4. 학자적 면모

󰡔퇴암집󰡕에 드러난 퇴암의 학자적 면모를 성리학자적 면모, 문학적 자질, 유림에서의 역할로 나누어 고찰한다.

1) 성리학자적 면모

퇴암이 남긴 저서 중에 학자로서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글로는 「蘆山問答五條」, 「錦陽記善錄」, 「洛閩言敬錄」, 편지 등이 있다. 「노산문답5조」는 배움, 心, 敬, 行誼, 科擧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손님과 대화하는 형식으로 기술하였다. 「금양기선록」은 금양에서 지켜본 스승의 언행을 정리하여 기록한 글이다. 「낙민언경록」은 程子ㆍ朱子 및 그의 후학들이 경에 관해서 언급한 것을 분류하여 모은 글이다. 「낙민언경록」의 「後敍」에 의하면, 주자가 경에 관한 요점을 수집 정리한 문헌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가 없고, 명나라 程敏政이 지은 󰡔心經附註󰡕는 내용은 상세하지만 계통을 세워서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용을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있어서, 퇴암이 이 「낙민언경록」을 짓게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는 퇴암이 다른 학자들과 주고받은 편지에 나타난 이론 중, 中庸의 ‘中’, ‘理氣論’, ‘涵養과 存養’을 중심으로 퇴암의 견해를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중용에서 말하는 中의 개념 중에서, 발현하기 전에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어지지도 않은 것은 中和의 ‘중’이며, 이것은 주자가 말한 성의 본체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이 중은 性을 형상화하면 體를 말하게 되고, 도를 형상화하면 체와 用을 겸하여 말하게 된다. 발현하여 절도에 맞으면 곧 중이 제 자리를 지키게 되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추구하는 길이 된다. 하지만 발현하여 절도에 맞지 않으면, 중은 이미 중이 아니어서 소멸되고 만다. 이 발현한 뒤의 중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鄭葵陽(1667~1732)과 의견의 차이를 보인 적이 있다.

정규양은 자가 叔向이고, 호가 篪叟이며, 永川 사람으로, 형 鄭萬陽과 함께 갈암 문하에서 배운 적이 있다. 정규양은 남송의 철학자 南軒 張栻의 견해를 지지하여, 발현한 뒤에는 절도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따질 것 없이 반드시 중이 주체의 이면에 있다고 하였다. 정규양이 이렇게 주장한 것은 󰡔中庸或問󰡕에서 이른 바 ‘속에 있는 中’은 ‘발현하지 않은 중’으로 볼 수 있지, ‘중’ 이외의 ‘중’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을 논리적 근거로 삼은 것이다. 퇴암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 발현하지 않았을 때에 속에 있는 것은 이미 발현했을 때에 밖에 있는 것과 짝이 된다’는 주자의 견해를 논리적 근거로 삼았다. 말하자면 속에 있는 중이 발현하지 않고 내재해 있을 때는 중이 될 수 있지만, 이미 발현한 뒤에는 밖에 있는 것이 절도에 맞으면 중을 유지하여 안에 있는 것도 중이 되지만, 밖에 있는 것이 절도를 잃으면 이미 중을 상실하였으니, 내면에 있는 것도 중이 될 수 없다는 논리이다.

퇴암은 퇴계에서 갈암으로 이어진 학통을 충실하게 계승하려고 노력하였다. 따라서 성리학의 이론도 理와 氣를 각각의 뿌리를 가진 존재로 보았다. 이와 기가 비록 서로 떨어져 있지는 않으나, 각각의 뿌리가 있으므로 혼동하여 같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이와 기가 서로 어우러져 마음을 이루고 있지만 이는 순수하고 참되며, 기는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성은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이 있는데, 본연의 성은 기와 섞이지 아니한 理이며 따라서 본연의 성은 순수하고 선하다. 반면에 기질의 성은 이와 기가 부여된 가운데서 기가 주관하여,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인간이 내면에 지니고 있는 情도 마찬가지이다. 정은 四端과 七情의 구분이 있으며, 사단은 이가 주관하여 순수하고 참되며, 칠정은 기가 주관하여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가 주관하는 것은 본연의 성이고 사단이며, 기가 주관하는 것은 기질의 성이고 칠정이다.

이와 기는 서로 필요하여 떨어지지 않고 서로 기다려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이가 없는 기가 없고, 또한 기가 없는 이가 없다. 이가 발현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를 위주로 말한 것일 뿐, 엄연히 기가 그 속에 있으며, 기가 발현하였다고 하는 것은 기를 위주로 말한 것일 뿐, 이가 엄연히 그 가운데 있다. 그러니 이를 위주로 한다는 말은 기를 제외하고서 이를 논한 것이 아니며, 기를 위주로 한다는 말은 이를 제외하고서 기를 논한 것이 아니다. 이기론은 이와 기를 섞어서 말한 부분도 있고, 분별하여 말한 부분도 있다. 같은 곳에 나아가 다른 점을 알되, 다른 것이 다른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곳에 나아가 같은 점을 알되, 같은 것이 같은 것에 그치지 않은 뒤에라야 두루 통할 수 있다. 그러니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도 이것을 칼로 자르듯이 나누어서 분리된 별개의 두 가지로 보아서는 안 되며, 그렇다고 하여 사단과 칠정을 섞어서 한 가지로 보아서도 안 된다. 이가 비록 기 가운데 있거나 기가 비록 이 가운데 있더라도, 기는 기대로 이는 이대로 각각 뿌리가 있어 서로 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황수일은 퇴암과는 갈암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이다. 그가 보낸 편지 가운데에 ‘기품 가운데에서 본성을 발라내면, 사단도 칠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논의가 있어서 이를 비판하는 답장을 보낸 글이 있다. 기품 가운데에서 본성을 발라내면, 사단도 칠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이와 기가 서로 뿌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기가 주가 된다는 논리이니, 스승의 가르침에 위배되며, 이는 기호학파의 주장에 가까운 논리여서 비판한 것이다.

퇴암은 涵養과 存養을 같은 개념으로 보았다. 일반적으로 함양은 동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존양은 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데, 함양이니 존양이니 하는 말은 모두 마음[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러니 이 마음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고찰함으로써 그것이 동적인 존재인지 정적인 존재인지 알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퇴암은 신익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존양이라는 말은 맹자가 한 말로 ‘마음을 보존하고 덕성을 함양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면서, 마음이라는 것은 체와 용을 갖추고 있으며, 性은 안팎이 없으니, 체와 용을 갖추고 있으면서 안팎이 없는 것은 동과 정을 겸하여 꿰뚫는 것이라고 하였다.

곧 덕성을 함양한다고 하거나, 인성을 보존한다고 하는 말은 모두 마음을 전제로 하는 말이며, 이 마음은 동과 정을 겸하여 지니고 있는 존재이니, 함양은 동이며 존양은 정이라는 구분을 지우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본 것이다.

퇴암은 또 이 마음을 매우 폭넓은 실체로 이해하여, 이와 기, 성과 정, 기질, 사단, 칠정도 모두 이 마음속에 포함된다고 보았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면, 중용에서 말하는 中이 발현하여서 절도를 지키면 중이 제 자리를 지키지만, 절도를 잃으면 이미 중을 상실하고, 내면에 있는 짝도 중이 될 수 없다. 이기론의 이와 기는 서로 관계가 밀접하여 이가 없는 기가 없고, 기가 없는 이가 없다. 이와 기는 비록 서로 떨어져 있지는 않으나, 각각의 뿌리가 있어 섞이지 않는 별개의 존재이다. 그리고 함양과 존양은 동과 정을 겸한 것이어서, 이를 동과 정으로 나누어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였다.

2) 문학적 자질

퇴암은 남다른 문학적 자질을 타고났다. 당시 갈암의 문하에는 사방에서 명성에 끌려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러한 제자들 중에 퇴암은 문학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재능을 드러내었다고 한다. 그리고 퇴암이 실제 창작하고 서술한 글들은 시속의 고루한 투를 벗어나 남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 같은 시대 사람들의 평가였다. 이재는 당시 퇴계학파의 適傳者로서 학자적 명성이 매우 높은 사람이었는데, 퇴암의 문학적 자질을 평가하여 문사가 전아하다고 자주 칭찬하였다. 柳致明(1777-1861)은 조선 후기 사람으로 조야에 명성이 높은 학자였다. 퇴암의 「묘지명」을 썼는데, 당시 문학을 잘하여 추대를 받았으며, 타고난 재주가 뛰어났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갈암의 제자 金聖鐸은 학문이 깊고 조야에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는데, 퇴암의 문학적 자질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문학에는 또한 반드시 汝行을 추앙하여 모두가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시문과 잡저에는 또한 그가 가슴에 품은 뜻과 취향의 고상함이 시류의 습속보다 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퇴암이 문학 분야에서는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음을 공인한 셈이다.

3) 유림에서의 역할

息山 李萬敷는 徵士이다. 자가 仲舒이고 호는 息山이며, 󰡔息山文集󰡕 등 많은 저서가 있다. 학계에 명성이 있어서 임금의 부름을 받은 적이 있어서 징사라 일컬어진 학자였다. 누대에 걸쳐 서울에서 살았으나, 아버지의 귀양살이를 시봉한 후 관계 진출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만 열중하였으며, 1700년대에는 경북 상주에 이거하여 영남학자들과 교류가 잦았다.

이만부가 어느 날 퇴암과 理氣에 관한 여러 학설을 논의한 뒤 크게 칭찬하면서 “汝行의 학문은 그 폭이 매우 넓고 깊어서, 마땅히 경상우도의 儒宗이라 할 만하다.”고 하였다. 이만부가 퇴암의 학문적 위상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德川書院은 남명 조식이 만년에 덕산에서 후학을 양성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서원이다. 따라서 이곳은 이 일대 儒學의 本山이라고 할 만한 곳이다. 퇴암은 이곳 덕천서원에서 院任을 역임하였다. 또 23세의 젊은 나이에 덕천서원의 강당인 「敬義堂重修記」를 썼다. 이러한 사실을 허권수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1702년 德川書院의 강당인 敬義堂을 중수했을 때, 權重道는 그 「重修記」를 지었다. 그 당시 德川書院을 출입하는 수많은 쟁쟁한 학자ㆍ선비들이 있었는데도, 그 가운데서 權重道가 「重修記」를 지었다는 것은, 그의 學問, 文章, 人望이 어떠했는가를 端的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퇴암은 「경의당중수기」에서 학문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敬과 義이며, 남명 선생 또한 이것으로 후학을 가르쳐 이끌었으니, 선생이 남긴 가르침을 따라서 우리들도 이 경과 의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후학을 가르쳐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덕천서원에서 학업을 연마하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모두 경과 의를 학문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퇴암이 덕천서원의 원임으로서 이 지역 학문을 이끌었을 때에 이것은 중요한 지침이 되었을 것이다.

󰡔퇴암집󰡕에 수록되어 있는 편지와 만장에서도 퇴암이 당시 유림에서 어느 정도 신망을 받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다.

퇴암이 21세 때에 김성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남명 선생의 󰡔學記󰡕에 ‘無極은 형이상이고, 太極은 형이하’이라는 기록을 그대로 믿는 것은 잘못임을 조목조목 설명하면서, 이것은 후대에서 전사할 때 잘못한 것을 답습한 결과일 것이라고 말하였다. 김성운과 주고받은 편지는 이뿐만 아니라, 󰡔남명연보󰡕를 작성하면서 裵紳의 글을 싣지 않겠다는 김성운의 말에 대해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조목조목 설명하는 내용에 이르면, 마치 타이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강여관이 갈암 사후 스승의 상복을 어떻게 입어야 할 것인가를 퇴암에게 질문한 데 대해서 답한 편지가 있다. 당시의 사회에서 상례는 아주 중요한 사회적 규범이었다. 이것이 예법에 맞지 않으면 선비는 제대로 사회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없는 풍토였다. 퇴암은 선인의 예를 소상하게 들고서 자신의 상례를 소개하여 매계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안내를 해 주고 있다.

34세 때 김상정에게 보낸 편지에서, 함양과 성찰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점을 지적하여 바로잡아 주면서, 안명하에게도 비슷한 내용을 말해 주었다고 하였다. 학문적으로 이끌어 주는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李栽는 퇴암과 오랫동안 교유하여 서로 잘 아는 사이이다. 퇴암보다 23세 연장이고, 학문과 인품이 두드러져 갈암이 세상을 떠난 후 한 때 스승으로 모시고자 하였던 인물이다. 퇴암 사후 그는 만장에서 퇴암이 갈암 문하에 입문하여서부터 걸어온 행적을 회고하고, 퇴암은 마음을 선하게 가져 싫증을 내지 않고자 노력하였으며, 뜻은 늘 원대한 곳을 지향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자신이 노령으로 학문의 판단이 흐려질 때 퇴암은 때때로 자신의 흐린 눈을 확 뜨게 해 주었는데,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 아침저녁으로 교유하기를 바랐건만, 하루아침에 유명을 달리 하니 떨어지는 눈물을 거둘 수가 없다고 슬퍼하였다.

특히 마음을 선하게 가져서 싫증내지 않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였으며, 뜻은 늘 원대한 곳을 지향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하여, 퇴암의 인격적 면모를 드러내었다.

李復煥은 줄곧 갈암 문하에서 퇴암과 공부를 같이 한 사람이다. 만장에서 ‘學舍에 일이 있으면, 반드시 汝行이 그 예를 주관하였다’고 회고하면서, ‘좀 더 살았으면 학계에 반드시 우뚝 설 수 있을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퇴암은 평소 상대방과 토론을 하면서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거나 동조하지 않는 것을 가리지 않고 겸허하게 남의 말을 수용하는 도량을 가지고 있으니,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하여, 퇴암의 도량이 어떠한 가를 보여주고 있다.

河大觀(1698-1776)은 자가 寬夫이고, 호가 愧窩인데, 퇴암보다 18세 아래이다. 퇴암 사후에 쓴 만장을 보면 무척 퇴암을 따랐던 것을 알 수 있다. 인품이 자상하고 화평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였고, 일찍부터 높이 세운 학문적 목표는 주위 사림들보다 뛰어났다고 하였다. 학문을 연마하는 과정은 늘 심신을 돈독하게 하였고, 배운 것을 몸소 실행하여 원근 사람들이 흠모하였으며, 퇴암의 사랑에는 늘 동학자들이 기거하면서 가르침을 받고 교화를 받았다고 하여, 퇴암의 생전 인품이 어떠하였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상 고찰한 바와 같이 퇴암은 성리학자로서 퇴계에서 갈암으로 이어진 학통을 계승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성리학의 이론도 이가 기와 비록 서로 떨어져 있지는 않으나, 각각의 뿌리를 가진 존재로 보았다. 함양과 존양은 동과 정을 겸하였기 때문에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고 하였다. 퇴암은 갈암 문하의 여러 우수한 제자들 중에서 문학적 자질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당시 경상우도 지역의 유림에서 학문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Ⅲ. 시 세계

1. 󰡔퇴암집󰡕의 구성

퇴암의 시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퇴암의 학문과 생애뿐만 아니라, 퇴암이 남긴 시문을 알 필요가 있다. 시문은 퇴암의 정신세계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문이 수록된 󰡔퇴암집󰡕을 개괄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퇴암집󰡕은 모두 7권 3책으로 되어 있다.

1권에는 「서문」과 시가 수록되어 있다. 「서문」은 제산 김성탁이 썼다. 시는 모두 41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근체시가 39수, 초사체 고시가 2수인데, 고시는 모두 만시이다.

2권에는 모두 편지가 실려 있다. 葛庵 李玄逸, 密庵 李栽, 克齋 申益愰, 珠潭 金聖運, 梅溪 姜汝寬, 龍岡 黃壽一, 谷川 金尙鼎, 진사 權畣, 曺灝, 尹季吉, 朴仁仲, 吳道源, 申益垕, 생질 李成大, 許泂, 魯溪 李復煥, 聾窩 李寅煥, 松窩 安命夏, 息山 李萬敷, 진사 河世應, 養正齋 河德望, 逋軒 權德秀 등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중에서 이현일, 이재, 김성운에게 보낸 편지가 각 3편, 신익황, 강여관, 김상정에게 보낸 편지가 각 2편, 나머지는 1편씩이다.

3권에는 序, 記, 祭文이 수록되어 있는데, 서는 「先師手書十六字後序」, 「趙氏忠烈記後序」, 「德川留別金伯源序」, 「摹朱子手書敬齋二字寄金德三序」 등 4편이며, 기는 「退庵記」, 「孝子掌令許公旌閭記」, 「敬義堂重修記」, 「安宅記」, 「從祖祖父護軍公陞資壽讌記」, 「吉洞蟠松記」 등 모두 6편이다.

「조충렬기후서」는 知足堂 趙之瑞의 충렬기에 대한 서문이다. 「퇴암기」는 자신의 호에 대해 설명한 기문인데, 산림에 묻혀 사는 자신의 입장을 말하였다. 「경의당중수기」의 경의당은 덕천서원의 강당이며, 「안택기」는 일종의 天君系 소설로 인간의 심성을 의인화하였다. 「길동반송기」는 진양 서쪽 50리쯤 되는 길동에 있는 반송을 보고 소감을 적은 수필이다.

제문은 「祭葛庵李先生文」, 「祭再從弟重常文」, 「祭曺汝深文」, 「祭李君栟文」, 「祭姜君平文」 등 5편이다.

4권에는 모두 雜著가 실려 있는데, 「書蘆山自警錄後」, 「蘆山問答五條」, 「錦陽記善錄」, 「後叙」 두 편 등 모두 4편이다. 「노산문답 5조」는 배움, 心, 敬, 行誼, 과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손님과 대화하는 형식으로 기술하였으며, 「금양기선록」은 금양에서 지켜본 스승의 언행을 정리하여 기록한 것이다. 「후서」는 「금양기선록」에 대한 후서인데, 하나는 퇴암 자신이 쓴 글이고, 다른 하나는 신익황이 쓴 글이다. 「書蘆山自警錄後」는 「노산자경록」의 「後叙」인데, 「노산자경록」은 문집 출판 당시 이미 유실되고 없었다.

5권에는 행록과 묘갈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행록은 「先祖安分堂公行錄」, 「先府君行錄」, 「松窩處士姜公行狀」 등 3편이, 묘갈명은 「外王父忠義衛黃公墓碣銘」, 「亡弟汝大墓誌」 등 2편이다.

6권은 별편으로 「洛閩言敬錄」과 「後叙」가 실려 있다. 「낙민언경록」은 정자ㆍ주자 및 그의 후학들이 敬에 관해서 언급한 것을 분류하여 저술한 것이며, 「후서」는 퇴암이 「낙민언경록」을 저술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 글이다. 후서의 내용은 ‘성리학자적 면모’에서 이미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7권은 부록으로 퇴암 사후에 퇴암의 지인들이 지은 글이다. 「行狀」, 「墓碣銘」, 「墓誌銘」, 만장 등이 수록되어 있다. 「행장」은 尼溪 朴來吾가 썼는데, 박래오는 퇴암의 후배인 朴經一의 아들이다. 「묘갈명」은 김성탁이 썼으며, 「묘지명」은 유치명이 썼다. 수록된 만장은 李栽, 權德秀, 金聖鐸, 李復煥, 曺錫基, 權富, 盧世寶, 朴思敦, 金聖運, 權大銓, 李佖, 朴垕彦, 河世應, 姜老星, 朴經一, 李潤慶, 河大觀 등이 지었다.

2. 시 개관

󰡔퇴암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는 모두 41수이다. 이것을 다시 분류해 보면, 近體詩가 39수, 楚辭體 古詩가 2수이다. 근체시는 오언 절구 11수, 칠언절구 21수, 오언 율시 2수, 칠언 율시 5수로 되어 있어 칠언 절구가 압도적으로 많다.

퇴암의 시에는 세상사를 근심하는 시가 많다. 퇴암은 유학자였다. 유학자는 본질적으로 국가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다. 이들이 국가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잘못된 현상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많이 보아왔다. 퇴암도 역시 당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근심하였으며, 남긴 시에는 이러한 의식이 반영된 시들이 많다.

퇴암은 「퇴암기」에서

 

녹봉과 이익이 나를 유혹하면 뒤로 물러나서 사절하여 물리치고, 물욕이 나를 오염시키면 뒤로 물러나서 씻어내며, 세상의 영욕을 잊고 한가한 가운데 정신 수양에 자유로우니, 한결같이 겸손하게 물러났다.

 

라고 하여, 녹봉과 물욕을 함께 물리친다고 하였다. 녹봉을 물리친다는 말은 관직에 미련을 갖지 않겠다는 말이다. 퇴암이 관직에 관심을 두지 않고 물욕을 멀리하겠다는 말은 세상사와 담을 쌓고 살겠다는 말이 아니라, 청정한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세상의 영욕을 잊고 자유롭게 정신 수양을 하면서 사는 사람은 그만큼 세상의 이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웠을 것이고, 일생을 깨끗하게 살면서 사회를 정화하는 좌표가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퇴암의 시에서 시적자아가 근심하고 있거나 우수에 젖어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퇴암의 이러한 삶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학자가 학문 활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며, 올바른 학문 활동을 하려면 여유를 가지고 느긋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조급한 마음으로 쫓기듯이 하여서는 올바른 학문 연마가 되지 못한다. 특히 덕성 함양과 지적 활동을 동시에 추구했던 당시의 학문 활동에서는 여유를 가지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는 것이 학문하는 기본 바탕이기도 하였다. 평생 학문 연마에 진력한 퇴암으로서는 이러한 부류의 시가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예로부터 선비가 자연을 벗삼고 그 아름다움을 즐기는 일은 마음을 다스리고 심성을 도야하는 한 방편이었다. 음풍농월하며 호방하게 객기를 부리는 부류와는 성격이 다르다. 지리산 獐項洞은 서부 경남 일대에서도 경관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퇴암은 이런 곳을 찾아 심신을 수양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완상하는 시들을 다수 썼다. 물욕이 자신을 오염시키면 뒤로 물러나서 씻어내며, 세상의 영욕을 잊고 한가한 가운데 정신 수양에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연을 벗삼고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도 필요하였을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애환 중에서 이별은 예로부터 시의 제재로 많이 쓰였다. 그만큼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는 의식도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어야 하는 가슴 아픈 일의 하나인데, 당시 사회에서는 깊은 관계를 맺고 지냈던 사람에게는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쓰는 것이 사회적 관습이었다.

이러한 제반 사항을 바탕으로 하여 퇴암의 시 세계는 ‘憂患意識’, ‘勸學과 自適’, ‘자연친화’, ‘惜別의 情懷’로 나누어 고찰하기로 한다.

3. 憂患意識

퇴암의 많지 않은 유작 가운데 거의 10여 수가 우환의식을 지닌 작품이다. ‘자연친화’와 함께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작품 영역이다. 이것은 퇴암이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 의식을 그만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다음 시는 대원암의 아름다운 풍경에 도취되어 세간의 모든 근심을 잊고 있는 장면이다.

 

세상 밖 진경을 찾는 나그네 物外探眞客

그윽한 외길을 찾아간다. 行尋一逕幽

물빛은 푸른 산을 머금고 波光含翠岳

꽃빛은 모래강변에 비친다. 花色暎滄洲

학은 천년 나무에서 춤추고 鶴舞千年樹

안개는 백 척 누각 위를 난다. 烟飛百尺樓

등나무 그늘진 정자 위에서 藤陰古亭上

세간의 근심을 모두 씻는다. 消盡世間愁

 

그런데 여기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대원암의 진경을 보고서 세간의 근심을 모두 씻었다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뒤집어 말하면 평소에는 세간의 근심이 작자의 마음속에 늘 자리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 근심은 세간의 근심이다. 세간의 근심이란 사사로운 개인 문제에서 유발되는 근심이 아니라, 사회적 관심사에서 유발되는 근심이다. 사회적 관심사에서 유발되는 근심이라면, 당시 영남 우도 지역이 정치적으로 핍박받는 문제일 수도 있고, 부패한 사회상이 근심거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를 걱정하는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책임 의식이 수반된 근심이다.

다음 시도 「大源庵」과 비슷하게, 세상 근심을 드러내고 있다.

 

뿌린 빛은 천 층의 눈이요 撒色千層雪

포효 소리 골짝마다 우레로다. 吼聲萬壑雷

주저하며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니 踟躕久不去

세상 근심 자연히 재가 되었네. 世慮自然灰

 

폭포 쏟아지는 장관을 보면서, ‘세상 근심 자연히 재가 되었네’라는 표현은 역설적이게도 시적자아의 내면에는 늘 세상 근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 근심이란 이 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퇴암의 시에 따라다니는 심적 상황이다. 「大源庵」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근심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근심이다.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느끼고 있는 근심이다. 先憂後樂하는 삶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다음 시는 첫째 수와 둘째 수는 느긋하고 한가한 분위기인데, 셋째 수는 고적과 근심이 가득하다.

 

비갠 뒤 미풍에 시원한 기운 일어 雨後微風納晩凉

헌함에 높이 누워 복희씨를 꿈꾸었네. 憑軒高臥夢羲皇

깨어나 느긋이 책상을 마주 하니 覺來謾對書床坐

숲속의 매미 소리 석양을 알리네. 樹裏蟬聲報夕陽

 

솔바람 냇물 소리 집안에 가득하고 松籟溪聲滿一堂

늦바람이 실어오는 서늘한 기운. 晩風輕颺薦新凉

문밖에는 객이 없고 마음엔 일이 없어 門無外客心無事

한가히 책상을 대하는 맛 정말 좋구나. 閒對書床味正長

 

황량한 초가에 저녁연기 잠겨 있고 小屋荒凉鎖暮烟

병든 회포 고적하니 근심만 가득. 病懷孤寂任悄然

무단히 떨어지는 깊은 밤 처마 비 無端半夜疎簷雨

은자의 지친 잠을 깨우는구나. 覺殺幽人倦後眠

 

이 시는 석양 무렵부터 깊은 밤까지의 시간의 이동을 배경으로 하여, 시적자아의 내면에 일어나는 심적 상황의 변화를 세 수의 시로 나누어 노래하고 있다. 첫째 수에서 시적자아는 석양 무렵, 비 갠 뒤의 시원한 미풍을 받으며 헌함에 누워서 잠시 낮잠을 잔다. 자면서 복희씨를 꿈꾸었다. 복희씨는 중국의 아득한 상고 시대에 성덕을 베푼 제왕이다. 그러니 시적자아는 성인의 정치를 꿈 꾼 것이다. 둘째 수에서는 한적하고 시원한 가운데 가벼운 마음으로 책상을 대하는 마음을 노래하였다. 집안에는 솔바람 소리, 냇물 소리만 가득하고, 찾아오는 손님도 없어 마음이 가볍다. 평화스럽고 한적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셋째 수에서는 상황이 급변한다. 마음 깊은 한 곳에는 병든 회포에 고적하니 근심만 가득하여, 밤이 깊도록 뒤척이다가 겨우 선잠이 들었는데,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에 지친 잠을 깨고 만다. ‘황량한’, ‘병든 회포’, ‘고적’, ‘근심’, ‘은자’, ‘지친 잠’ 등은 모두 시적자아가 처해 있는 상황이 어떠한가를 잘 알게 해 주는 시어들이다. 황량한 오두막에서 병든 마음을 부둥켜안고 고독하게 지내는 밤, 근심으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인다. 성인의 정치를 꿈꾸면서 공부하지만, 처해 있는 자신의 현실은 병들고 근심만 가득한 한 사람의 은자일 뿐이다. 이 시에 드러난 시적자아의 모습은 현실에 처해 있는 퇴암의 모습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다음 시는 개를 통하여 세태를 풍자하였다. 「아이가 개 한 마리를 얻어서 길렀는데, 다음 해 여름에 집안이 가난한 탓으로 먹일 것이 없어 개를 사육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개를 내보냈는데, 오히려 주인을 그리워하여 가지 않고, 밤에는 사립문을 지키고서 짖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느낀 바가 있어 이 글을 지었다.」라고 하여 이 시를 짓게 된 배경 설명을 겸하여 긴 제목을 달아둔 시이다.

주인 그리는 깊은 정성 무슨 사연인가? 戀主深誠底事因

사육의 은혜 느껴 절로 서로 친했지. 啣恩飼養自相親

사육을 끊은 지금도 그리움 아니, 如今輟養猶知戀

얼굴 바꾸는 인간을 부끄럽게 하네. 堪愧人間換面人

 

사랑하는 어린 아이가 구해온 개라면 퇴암을 비롯한 가족 구성원들이 얼마나 정을 주었겠는가? 그러한 개를 먹이를 제대로 대어줄 형편이 못되어서 집밖으로 내놓아야 했으니, 당시의 어려운 생활이 어떠하였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집 밖으로 내친 그 개가 밤새도록 문 밖을 지키면서 짖고 있는 소리를 듣는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이러한 상황에서도 시인은 가난 타령이나 원망 따위의 사설을 늘어놓지 않는다. 충직한 개와 안면을 쉽게 바꾸는 인간을 대비하여 인간의 부끄러운 심성을 한탄하고 있을 따름이다. 끝 행의 ‘얼굴 바꾸는 인간을 부끄럽게 하네[堪愧人間換面人]’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개다. 개가 인간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인간이 인간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개가 인간을 부끄럽게 만드니 말이다. 이런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이해에 따라서 쉽게 안면을 바꾸는 그런 인간이다. 杜甫의 시에도 이와 같이 경박한 인간 세태를 풍자한 시가 있다. 손바닥을 뒤집듯이 세상 인심이 바뀌는 것을 풍자하였는데, 그 당시도 퇴암이 겪었던 세태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

다음 시는 퇴암의 시 중에서 여과되지 않은 감정을 드러낸 유일한 시이다. 그만큼 심정이 절박했음을 말해준다.

 

미친 듯 취한 듯 어리석은 듯 如狂如醉又如癡

한밤중 방황하다 문 닫는 것 늦네. 中夜彷徨閉戶遲

정도가 뒤집혀 사도가 되는 시절 正道翻爲邪徑日

순박한 풍속은 야박하게 변했소. 淳風變作澆醨時

바로잡을 큰 계책 이제는 글렀으니 挽回大計今無望

옛날에 기약한 깊은 산으로 들어갈까. 引入深山舊有期

지금부터 굴을 찾고 숲을 찾아 가면 探穴尋林從此去

흰 구름 이는 곳 따르기 좋으리. 白雲處處好相隨

 

이 시에는 시적자아가 내면의 갈등을 억제하지 못하고 거의 폭발 직전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을 바로잡을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일을 도모할 생각이었지만, 正道가 뒤집혀 邪道가 되고, 순박한 풍속은 야박하게 변하여, 모든 것이 틀렸다고 생각된다. 감당할 수 없는 갈등으로 밤이 깊도록 방황하다가 집으로 돌아왔지만 지금 심정은 미칠 것 같다. 퇴암의 일생에서 이토록 심한 갈등을 겪어야 했던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문집에 나타나 있는 자료로 추정하면 스승의 復官과 還收 사건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퇴암이 이재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선사의 관직을 회복하라는 왕명이 두 번 내렸다가 두 번 거두었습니다. 성상께서 돌보아 생각하시는 뜻은 참으로 감격하고 축하할 일입니다만, 시절의 일이 험난함이 이와 같은 상황에 이르렀으니, 울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중도는 질박하고 우둔한 자질이지만, 그래도 세상일을 담당하려는 뜻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후부터는 결단코 시류와 더불어 따라서 공명에 나아갈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과거 시험을 사절하고 궁벽한 산중에 자취를 감춘 채 분수를 지키고 뜻을 추구하면서, 대강이나마 중용의 도를 받아서 태어난 책임을 다하려 합니다. 나머지 자신 외의 일에는 진실로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다만 생활이 쓸쓸하고 고루하며 옆에는 힘써 도와주는 이가 없으니, 끝내 성취하는 일이 어찌 꼭 가능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두렵습니다.

 

갈암의 복관과 환수 사건은 퇴암이 31세(1711년) 때 일어난 사건이다. 스승의 명예가 회복되려다가 좌절된 사건은 제자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충격적인 일이었다. 더욱이 혈기 방장한 시기였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서 이 시의 배경이 되는 사건은 갈암의 복관과 환수 사건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스승의 명예를 회복하려다가 좌절되는 환란에 이토록 분노하는 것은 평소 퇴암이 스승을 공경하는 태도가 어떠하였는가를 잘 알게 해 준다. 인용한 편지에서도 보았듯이 퇴암은 결코 처음부터 세상일을 담당할 뜻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과거를 볼 뜻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스승의 복관과 환수 사건을 보면서 당시의 정치 현실에 절망하였고, 과거를 본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모든 계책이 이제는 틀렸으니 시적자아가 선택한 탈출구는 ‘옛날에 기약한 깊은 산’이다. ‘깊은 산’은 절망한 뒤에 선택한 막다른 길이었다. 그 막다른 길 ‘깊은 산’이란 곧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만 진력하는 산림처사의 생활이다. 그곳을 찾아가면 흰 구름 이는 곳 따르기 좋으리라고.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서 고민하던 시인 박목월의 「나그네」가 막다른 골목에서 선택한 길은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가듯이/가는 나그네.

 

이었다. 퇴암이 막다른 골목에서 선택한 길도 ‘옛날에 기약한 깊은 산’이었다.

다음 시는 남명 조식의 학통이 거의 단절될 지경에 이른 상황을 가슴아파하는 내용이다.

어진 산과 지혜로운 물 빼어나게 맑음에 仁山智水秀而淸

우리 儒道 천 년 간 후생을 일으키네. 斯道千年起後生

입덕문 열리니 바른 길을 찾고 入德門開尋正路

세심정 예스러운데 높은 명성 우러렀소. 洗心亭古仰高名

산수는 완연히 선현 자취 띠었는데 林泉宛帶先賢躅

거문고 시가 낭송 대아에서 멀어졌소. 絃誦微茫大雅聲

한 줄기 연원이 이제 떨어지려 하니 一脉淵源今欲墜

솔바람 오동 달도 슬픔을 머금었소. 松風梧月摠含情

 

이 시는 덕천서원에서 진사 申命耈(1666-1742)의 시에 차운하여 쓴 시이다. 덕천서원은 남명이 이곳에서 제자를 양성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서원이다. 신명구는 자가 國叟, 호는 南溪이고, 경북 사람인데, 남명의 학풍을 사모하여 한때는 덕천에서 살기도 하였다. 퇴암은 신명구와 동문수학한 사이는 아니지만, 신명구가 덕천에서 살 때에 남명을 존경하는 동질감으로 자연스럽게 교분을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어진 산은 지리산을 말하고, 지혜로운 물은 덕천서원 앞을 흐르는 덕천강을 말한다. 입덕문, 세심정은 모두 남명의 자취가 묻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선생은 제자들을 가르쳤고, 당시에는 그 명성이 대단하였으며, 이러한 교육의 보람은 儒道를 통해서 길이길이 후생을 일으킬 것을 기대하였다.

하지만 서원에서 들려오던 거문고 소리와 시가 낭송 소리마저 아득히 멀어져, 선생의 학통이 이제 거의 단절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덕천서원을 둘러보니, 들려오는 솔바람 소리나 오동나무에 걸려 있는 달도 슬픔을 머금은 듯이 보일 수밖에 없다. 솔바람 소리나 오동나무에 걸려 있는 달은 곧 시인 자신의 감정이 이입된 사물이기도 하다.

퇴암이 태어났을 때는 남명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넘었고, 퇴암이 청년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거의 4세대를 넘어서는 시대적 간격이 있었다. 그 사이에 격렬한 정치적 파란을 겪으면서 남명의 학통은 거의 단절될 지경에 이르렀고, 남명의 명성만 구전되어 전해지고 있으니, 후학으로서 느끼는 마음의 고통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시는 유람 생활도 덧없는 즐거움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띠를 베고 집을 얽어 은거지에 누웠으니 誅茅結屋臥菟裘

기쁘도다! 전원생활 좋은 일 많은 것을. 却喜丘園勝事優

차솥 연기 잦아지니 솔바람 소리 고요하고 茶鼎烟收松籟寂

돌 평상 잠이 평온하고 대숲은 그윽하다. 石床眠穩竹林幽

구름은 옛 산길 찾는 나막신을 맞이하고 雲迎古逕尋山屐

달은 새 강의 해오라기 찾던 배를 보내네. 月送新江訪鷺舟

얼마간 이 속의 뜬 세상 즐거움은 多少箇中浮世樂

가는 곳 마다 맑은 유람 방해받지 않는 것이라오. 不妨隨處任淸遊

 

1행부터 4행까지는 전원생활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모습이다. 살고 있는 집이라고 해야 띠를 엮어서 지붕을 인 오두막이다. 그저 몸 하나를 눕힐 수 있는 최소한의 생활공간일 뿐이다. 이러한 공간 속에서 전원생활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속에서 차를 달이고 있다.

차 달이는 연기가 잦아들면서 알 듯 모를 듯 솔바람도 잦아들고, 그윽한 대숲 가에서 돌 평상에 누워 낮잠을 즐기는 그 기쁨이 어떠하겠는가? ‘차솥 연기 잦아지니 솔바람이 고요하고[茶鼎烟收松籟寂]’는 이숭인의 시 ‘한 줄기 푸른 구름 흰구름 물들인다[一帶靑煙染白雲]’를 연상시킨다. 5행과 6행은 모두 자연의 사물이 주체가 되어 있다.

구름이 나막신 신은 사람을 맞이하고, 달이 뱃사공을 보내고 있다. 일상의 파격이다. ‘나그네는 구름 덮인 옛 산길을 찾고’라고 표현했다면 진부함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달은 새 강의 해오라기 찾던 배를 보내네.’도 그 발상과 표현이 새롭다. 달이 배를 전송하는데, 그 배는 새 강에서 노는 해오라기를 찾던 배이다. 낮에 해오라기가 있었던 곳을 한 척의 배가 천천히 지나가는 장면을 이렇게 구사한 것이다.

시간의 격차를 초월한 표현이다. 이러한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시적자아가 내린 결론이 마지막 두 행에 제시되어 있다. 좋은 일이 많다고 하여도, 그 기쁘고 즐거운 일이라는 것이 고작 가는 곳마다 맑은 유람 방해받지 않는 정도이고, 이러한 것들이 사실은 덧없는 세상 즐거움이라고 하였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거기에 도취되는 것도 사실은 덧없는 일이라고 마지막에 맺은 이 말은 어쩌면 퇴암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번민의 한 주축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것들이 덧없이 여겨졌을까? 이 문제의 답은 퇴암이 처한 당시의 사회적 현실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지식인들이 평생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면서 산림처사 생활을 한 것은 그 내면을 보면 자의가 아니었다. 자신의 역량과 포부를 펼 수 있는 길이 차단된 상황에서 찾아낸 어쩔 수 없는 자기 구원의 통로가 자연을 유람하며 즐기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유람의 즐거움도 때로는 덧없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음 시에는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이는 시적자아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밤 깊은 봄 산에 소쩍새가 울어 入夜春山聽子規

오경에 베개 기대어도 잠은 더디네. 五更欹枕夢來遲

창 열고 문득 보니 뜰 앞의 달이 開窓忽見庭前月

매화나무 첫 가지에 걸려 있구나. 掛在梅花第一枝

 

소쩍새가 울고, 매화나무에 달빛이 쏟아지고 있다. 비록 매화꽃은 떨어진 지 오래 되었지만 연두빛 새 잎은 그런대로 또 다른 정취를 제공할 것이다. 청각과 시각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장면에, 밤이 이슥할 때까지 소쩍새가 울어댄다. 그런데 시적자아가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것은 소쩍새 울음소리 때문은 아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리라. 잠은 오지 않는데 달빛이 밝기에 창 열고 밖을 보니 뜰 앞에 있는 매화나무 가지에 달이 걸려 있다.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시적자아는 과연 달빛 쏟아지는 아름다운 장면에 몰입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다. 이 시에는 어디에도 인물의 번민이나 고뇌가 언급되어 있지 않으면서, 수심에 찬 인물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우울한 분위기의 배경보다 우수에 찬 시적자아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부각된다. 시인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고뇌가 무엇인가는 여러 가지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사회적 세태가 고뇌의 내용일 수도 있다.

다음 시도 시적자아가 우수에 젖어 있는 모습이다.

 

솔바람도 적막한 산 속의 깊은 밤 山空籟寂夜三更

낙엽은 바람 따라 빗소리를 내누나. 落葉隨風作雨聲

잠 깨어 초당의 문을 열고 보니 睡起草堂開戶見

뜰에 가득 가을 달이 참으로 분명하네. 滿庭秋月正分明

 

산속의 깊은 밤, 낙엽 구르는 소리, 밝은 달, 가을 등 소재와 분위기가 조금은 쓸쓸하면서도 화사하다.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면서도, 그 그림속에 등장해 있는 시적자아는 어딘가 쓸쓸한 모습이다. 왜 그럴까? 공간 상황과 계절 배경이 그러한 느낌을 자아낼 뿐이다. 마당에 낙엽 구르는 소리에 잠을 깨었으니,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 내면 한 구석에는 번민이 자리잡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다만 짐작하게 해 줄 뿐이다. 이 시는 시적자아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직접 설명해 주지 않는다. 철저하게 ‘보여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2행의 ‘낙엽은 바람 따라 빗소리를 내누나[落葉隨風作雨聲]’는 표현이 감각적이다. 낙엽이 바람에 날리면서 내는 소리를 빗소리에 비유하고 있다. 호음 정사룡이 평생 득의구라고 자부하였던 ‘산 나무가 함께 우니 바람이 잠시 일어나고[山木俱鳴風乍起]’와 대비해 볼 만하다. 이 시는 어디에서도 여과되지 않는 감정 노출, 훈계조, 직설적인 표현 등은 없다. 그러면서 달밝은 정경을 배경으로 쓸쓸한 시적자아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퇴암의 시에서 근심하고 있는 자아는 주로 자신의 사사로운 문제 때문이 아니다. 사회적인 문제 때문에 근심하기도 하고, 성인의 정치를 실현할 수 없는 아픔 때문에 근심하기도 하였으며, 쉽게 얼굴을 바꾸는 세태를 부끄러워하기도 하였다. 스승의 문제 때문에 근심하기도 하였으며, 남명의 학통이 단절되려 하여 근심하기도 하였다. 유람의 즐거움이 부질없음을 한탄하기도 하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한 시대를 책임지는 지식인으로서 번민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4. 勸學과 自適

퇴암은 유학자였다. 자연히 같은 도를 추구하는 동학자들에게 학문을 권하기도 하고, 또 유유자적하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제 이러한 면모를 보이는 시들을 보기로 한다.

다음 시는 청년에게 학문을 권하는 내용이다.

 

젊은 시절 학문이 더디다고 한하지 말라. 莫恨靑年學問遲

지금부터 힘쓰면 어찌 모르리. 自今勉力詎無知

그대 만약 뜻이 있어 이 도를 따른다면 君如有意遵斯道

먼 길 출발해도 제 때에 이르리. 發軔脩途可及時

 

이 시는 청년 朴經一에게 준 시이다. 박경일은 단성현 남사에 살았던 사람으로 퇴암이 살았던 단성현 내원과는 거리가 멀지 않다. 12세 아래인 박경일이 학문 연마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퇴암에게 구도의 길을 묻는 시를 보내자, 후배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화답 시를 보낸 것이다. 3행의 ‘이 도[斯道]’란 물론 유학을 친근하게 이르는 말이다. 시의 내용이 마치 주자의 勸學文을 연상시킨다. 박경일의 아들 朴來吾는 뒤에 퇴암의 행장을 지었다.

다음 시는 경敬을 열심히 함양할 것을 권하는 내용이다.

 

이 도는 원래 사람을 멀리 하지 않아 斯道由來不遠人

성현의 가르침이 어찌 사람을 속이리. 聖賢謨訓豈欺人

경(敬) 자를 좇아서 부지런히 지키고 함양하면 能從敬字勤持養

못되어도 조심하는 사람 되는 건 잃지 않으리.下不失爲謹飭人

 

연장자가 쓴 시를 보고 차운한 시이다. 이 시의 핵심은 ‘경을 지키고 함양하자’는 권면의 내용이다. 학문의 관점이든, 종교의 관점이든 유학은 가장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출발하였다. 흔히 유학이라고 하면 고답적이고 위압하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는데, 그것은 유학을 잘못 이해한 후세 소인들의 행태 때문이다.

조선 시대 큰 유학자들의 언행을 보면 참으로 인간적이고 친근감을 갖게 하였다. 이 시에서는 유학이 원래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 인간 중심적인 학문임을 강조하고, 성현의 가르침 중에서도 핵심인 ‘敬’을 열심히 지키고 함양하면, 적어도 언행에 절도가 있고 삼가는 사람은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다음 시는 도에 뜻을 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내용이다.

도에 뜻 두고서 둔하다고 한탄 마오 志道莫歎才鈍遲

둔해야만 배워서 알 수 있다네. 鈍遲方可學而知

길의 맥을 따라 공력 들인다면 若遵路脉下功力

높은 가치 널리 퍼진 명성 얻는 때 있으리.長價遊聲會有時

 

이 시는 申進士가 쓴 시를 愧窩 河大觀(1698-1776)이 보고 차운 한 시를 퇴암이 보고 다시 화답한 시이다. 시상의 출발점은 신진사가 제공하였지만, 하대관이 자신의 아둔함을 한탄한 시를 써서 보내니, 퇴암이 용기를 북돋우어 격려한 시이다.

세 사람을 거친 셈이다. 남이 볼 때는 명석한 사람이라도 자신은 아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강한 사람일수록 이런 경향이 짙다. 하대관은 謙齋 河弘度의 증손으로 총명하며 학문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하대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둔함을 한탄하고 있고, 퇴암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하대관을 격려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시적자아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둘째 행에 있다. 둔해야만 배워서 알 수 있다는 말은 얼핏 보면 반어적인 말로 여길 수도 있는데, 이것이야 말로 시적자아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하대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둔함을 한탄하고 있고, 퇴암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하대관을 격려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시적자아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둘째 행에 있다. 둔해야만 배워서 알 수 있다는 말은 얼핏 보면 반어적인 말로 여길 수도 있는데, 이것이야 말로 시적자아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타고난 재주만 믿고 꾸준히 노력하지 않으면, 그 공부는 보잘 것 없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그러니 알고 있는 지식도 끊임없이 반복 학습하여야 그 지식이 내면화되어 자기 것이 되며 학문이 대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려면 번뜩이는 재주를 가진 사람보다는 오히려 빨리 이해하지 못하여도 꾸준히 반복 학습하는 유형이 대성할 수 있다는 말로, 학문의 왕도를 말하고 있다. 공자의 학통을 전한 사람은 공자로부터 魯鈍하다고 평가받은 曾子였다.

다음 시는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시인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먼지 없는 작은 집 해질녘 다시 쓸고 小閣無塵晩更淸

먼 산엔 그림같이 옅은 안개 깔렸네. 遠山如畵淡烟橫

한가하여 하릴없이 바람 난간에 앉으니 閑來聊倚風欞坐

비온 뒤 성긴 매미소리 모두 들린다. 聽盡疎蟬雨後聲

 

여름날 해질 무렵, 비가 지나간 뒤라 날씨는 쾌청하여 매미 소리가 더 잘 들리고, 먼 산에는 중턱에 옅은 안개가 깔려 있다. 깨끗하여 먼지가 없는데도 한 번 더 쓸고 난 뒤 개운한 마음으로 창을 기대어 앉아 있는 시적자아의 모습이 선명하다. 근심도 없다. 그저 유유자적한 모습만 잘 드러나 있을 뿐이다. 시를 읽는 사람도 따라서 마음이 가볍다. 얼핏 보면 전편이 서경(敍景)을 노래한 것 같으면서도, ‘보여주기’의 수법을 써서 시적자아의 서정을 제시하고 있다. 1행에서는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마루를 해질녘에 다시 한 번 쓸어서 더욱 깨끗한 이미지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비질하는 행동은 한적한 분위기를 더 잘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먼 산에는 옅은 안개가 깔려 있어 그림 같은 전원 풍경을 더한다. 한가하여 무료하기까지 한 시적자아는 바람이 잘 통하는 난간에 기대어 앉아 있으니, 매미 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비가 온 뒤이니 소리는 더욱 잘 들릴 것이다. 시 전편에 깔려 있는 분위기는 맑고 깨끗하다. 이 맑고 깨끗한 분위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시적자아의 모습이 선명하여, 시인의 인품이 배어 있는 느낌을 준다. 光風霽月을 연상하게 한다.

다음 시는 사월의 유유자적함을 노래하였다.

 

사월에 뽕과 삼에 비 내리니 四月桑麻雨

뽕과 삼 나날이 자란다. 桑麻日以長

요즈음 내 생활 부유함을 깨닫고 近覺生涯富

석양에 누워서 크게 노래 부른다. 高歌臥夕陽

 

봄비에 뽕과 삼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보고, 부자가 된 듯한 기분으로 석양에 노래 부르는 장면이다. 이 시는 어디에도 어둡거나 괴로운 내면이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전원생활에 만족하는 시적자아의 모습만 잘 드러나 있다.

다음 시 「夏日山亭三首」는 앞 절에서 이미 언급한 시이다. 셋째 수에 들어서기 전까지의 1,2수에는 한적한 생활을 누리며 유유자적한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시원한 미풍을 받으며 잠시 낮잠을 잔 뒤, 석양 무렵 책상을 마주하는 모습은 참으로 여유 있다. 전반적인 감상과 해석은 이미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비갠 뒤 미풍에 시원한 기운 일어 雨後微風納晩凉

헌함에 높이 누워 복희씨를 꿈꾸었네. 憑軒高臥夢羲皇

깨어나 느긋이 책상을 마주 하니 覺來謾對書床坐

숲속의 매미 소리 석양을 알리네. 樹裏蟬聲報夕陽

 

솔바람 냇물 소리 집안에 가득하고 松籟溪聲滿一堂

늦바람이 실어오는 서늘한 기운. 晩風輕颺薦新凉

문밖에는 객이 없고 마음엔 일이 없어 門無外客心無事

한가히 책상을 대하는 맛 정말 좋구나.閒對書床味正長

 

황량한 초가에 저녁연기 잠겨 있고 小屋荒凉鎖暮烟

병든 회포 고적하니 근심만 가득. 病懷孤寂任悄然

무단히 떨어지는 깊은 밤 처마 비 無端半夜疎簷雨

은자의 지친 잠을 깨우는구나. 覺殺幽人倦後眠

 

다음 시는 한 해를 다 보내고 섣달 그믐날 밤을 맞이한 소회를 담담하게 노래하였다.

 

상머리서 대화하던 하인이 그대로인데 對話床頭僕未更

갑자기 놀랍게도 섣달이 되었네. 忽驚時節屬嘉平

좋은 시절 아름다운 광경 참으로 즐거운데 良辰勝景眞堪樂

벽속의 희미한 등불이 밤을 밝힌다. 壁裏殘燈照夜明

 

이 시는 李㭓이 보낸 시에 화답한 시이다. 퇴암은 이변과 친한 사이였다. 󰡔퇴암집󰡕 1권에는 만장이 두 편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한 편이 「이변 애도사」이며, 󰡔퇴암집󰡕 3권에는 또 「이변 제문」이 수록되어 있다. 생전에 이변과의 관계가 어떠하였는가를 짐작하게 해 준다.

이변은 갈암이 귀양살이 할 때 줄곧 옆에서 모시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갈암의 집안 조카인 것 같다. 그러니 퇴암이 광양에서 공부할 때부터 서로 잘 알았을 것이고, 서로 비슷한 나이여서 특별히 교분이 두터웠던 모양이다. 그러한 이변이 보낸 시에 화답한 시이다. 세월이 빨리 흘러 한 해를 다 보내는 날 밤의 소회를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다.

퇴암의 서간문을 보면 병고에 시달려 고생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시에서도 근심하는 모습, 우울한 내용이 다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런 점을 찾아볼 수 없다. 한 해를 보내면서 느긋하고 마음 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를 주고받은 사람이 깊이 마음이 통하는 벗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행의 ‘좋은 시절 아름다운 광경 참으로 즐거운데[良辰勝景眞堪樂]’는 벗과의 즐거웠던 시간을 떠 올린 장면이 아닐까. 1행의 ‘상머리서 대화하던 하인이 그대로인데[對話床頭僕未更]’는 빨리 지나가는 세월을 과장법을 써서 표현하였다. 일 년의 세월을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로 표현한 것이다.

여섯 편의 시는 모두 학문을 권장하는 내용과 함께 유유자적한 생활을 노래하였다. 학문은 단기간에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꾸준히 노력하라는 것, 敬을 지키고 함양하면 사람 노릇은 할 수 있다는 것, 학문은 명석한 머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맑고 깨끗한 운치, 전원생활의 만족, 한 해를 보내면서 갖는 느긋한 심정 등이 담겨 있다. 특히 괴와 하대관이 신진사 시에 차운하여 준 시에 화답한 글은 학문하는 요점을 적절하게 시화하였다.

5. 자연친화

퇴암의 시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제재가 바로 자연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이란 자연적 사물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41수 중에서 자연을 노래한 시가 26수이니, 작품의 약 63%가 여기에 해당된다.

다음 시는 매화분을 소재로 하였다.

 

누가 孤山의 씨앗을 가져와 誰把孤山種

단장하여 섣달에 봄이 되었나? 粧成臘月春

이 속의 청아한 흥미는 箇中淸興味

이해하는 이 아무도 없네. 領得也無人

 

엄동 섣달, 화분에 심어둔 매화가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고, 시적자아는 청아한 흥을 느끼건만 이러한 흥취를 아는 이가 없어 아쉬워하고 있다. 이 시의 어디에도 매화꽃을 직접 언급한 곳은 없다. 하지만 2행의 ‘단장하여 섣달에 봄이 되었나?[粧成臘月春]’에서 우리는 이 매화가 꽃송이를 피우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함축된 표현이 시를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1행의 孤山은 송나라 때 林逋가 은거하였던 浙江省 杭州에 있는 西湖 속의 섬을 말한다. 임포는 여기서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면서, 매화를 아내처럼 학을 자식처럼 생각하고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임포의 이러한 삶은 녹봉과 이익이 자신을 유혹하면 뒤로 물러나서 사절하여 물리치고, 물욕이 자신을 오염시키면 뒤로 물러나서 씻어내겠다는 퇴암과 닮은 점이 있다.

다음 시는 달 밝은 봄 날 초저녁의 정취를 노래하고 있다.

 

달밤에 강변 풍경 노래하니 桂月吟邊色

솔바람은 악보 없는 거문고. 松風譜外琴

강호의 봄은 만 리인데 江湖春萬里

해오라기만 나를 알아주네.鷗鷺作知音

 

강, 달밤, 솔바람, 해오라기가 어울린 풍경은 한 폭의 수묵화이다. 평화스럽고 한적한 강변의 풍경을 잘 드러내어 주고 있다. 이를 바라보고 있는 시적자아의 마음도 평화스럽다. 다만 시적자아의 내면세계에는 자연의 평화스러운 정경을 마음 턱 놓고 느긋하게 즐길 수만은 없는 그런 상황임을 ‘해오라기만 나를 알아주네.[鷗鷺作知音]’가 함축하고 있다. 주변의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상황이 시적자아의 마음 한 쪽을 누르고 있는 것 같다.

다음 시는 강가에 있는 바위 광제암을 노래하였다.

 

광제암 앞으로 길이 나 있고 廣濟巖前路

넓은 강에 해지는 가을. 滄江落日秋

이끼 꽃은 묵은 바위를 덮었는데 苔花封古石

어디에서 신선이 놀던 자취 찾을까? 何處訪仙遊

 

강, 가을, 해질 무렵, 이끼 꽃, 신선 등이 어우러져 이 시를 이루고 있다. 쓸쓸한 정취를 자아내기 쉬운 소재인데도, 막상 이 시를 대하면 그런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신선을 만나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기분도 아니다. 시적자아는 어느 가을날, 해질 무렵 강가의 바위를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겨 있는 그런 장면이다. 광제암은 지금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 청계리 개당 마을 앞에 있는 바위이다.

경관이 기이하고 아름다워 예로부터 시인들의 작품 소재로 자주 등장하였다. 최치원도 단속사에 가면서 이곳을 거쳐 갔다는 전설이 있다.

자연을 노래한 시 중에서 지리산의 ‘獐項洞’을 노래한 시가 11수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작품은 2수의 연시로 된 「次太守權公郃遊獐項洞韻二首幷序」와 9수의 연시로 구성된 「遊獐項洞九咏」이다. 이렇게 장항동을 노래한 시가 많은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장항동은 노루목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경남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대원사 계곡에 있는 지명이다. 지리산의 여러 명승지 중에서도 서부 경남에서는 가장 손꼽히는 절경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이 지역은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싶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곳이었다. 자연을 벗삼고 자연과의 교감을 노래하기 좋아하는 퇴암이 이곳을 자주 찾고 노래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다음 2수는 현감 權郃이 지은 장항동 유람 시에 차운한 시이다. 권합은 1719년부터 1723년까지 단성현감으로 재직하였던 인물이다.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던 중에 장항동을 유람할 기회를 가졌고, 그가 유람하면서 지은 시에 퇴암이 차운하여 두 수를 지었던 모양이다. 이 시에는 차운하게 된 배경을 시의 첫머리에 소상하게 밝혀두고 있는데, 배경 설명과 시는 다음과 같다.

 

옛날 明道 선생이 鄠縣의 고을 원으로 있을 때에 공무를 보는 여가에 終南山을 유람하면서 시와 글을 지은 적이 있었는데, 후세에 그 자취를 고상하게 여기어 지금에 이르도록 칭송하는 말이 쇠하지 않는다.

우리 태수 권공이 부임한 다음 해에 정사는 형통하고 사람들은 화합하여 관청이 매우 한가하였다. 이에 고을에 있는 몇몇 사람과 지리산 장항동으로 유람갈 것을 약속하였다. 장항동은 남명 조선생이 유람하면서 지나간 곳이며, 灌圃 魚公이 일찍이 터를 잡아 살던 곳이기도 하다.

기이한 경치와 그윽한 절경이 남쪽 지방에서 이름을 독차지하는 곳이니, 세상에서 속세를 벗어나고자 하는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한 번 이곳에서 놀기를 원하지 않으랴? 그러나 조정에 있는 사람이나 저자에 있는 사람 모두 그리워하지만, 구름과 안개 쌓여 아득히 먼 곳에 있고, 막막한 岷嶺을 보고 싶어 한 생각이 한갓 수고롭기만 하였고, 仇池에서 살고 싶어 했던 꿈이 이미 끝나 버렸으니, 모두가 그러하다. 저 천지 비경이 간직된 곳과 신령스러운 眞人이 살았던 굴을 어찌 사람마다 모두 엿볼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권공이 자욱한 풍진에서 벗어나 속세 밖에서 맑은 유람을 하며, 깊고 고요한 곳을 다 더듬었다. 험한 곳을 지나고 어려운 곳을 밟으며, 구름 덮인 산을 실컷 보면서, 평소에 품은 뜻을 즐겼으니, 그 소탈하고 우아하게 스스로 즐기는 취향을 어찌 대부분 평범한 속류에 비길 것인가?

내가 자질구레한 병에 얽매여 비록 유람을 따라가지는 못하였지만, 공의 산수 유람의 절구시 2 수를 보고, 생각이 더할 수 없이 깨끗한 것을 훌륭하게 여겨, 삼가 감히 화답하여서 흠모하고 부러워하는 뜻을 바친다.

 

배경 설명에 나오는 관포 어공은 魚得江(1470-1550)을 말하는데, 남명보다 약 30년 앞 시대 사람으로 관포는 호이며, 자는 子游이다. ‘막막한 민령을 보고 싶어 한 생각이 한갓 수고롭기만 하였다’는 말은 왕희지가 이 민령을 보고 싶어서 무던히 애를 썼지만 끝내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는 고사를 인용한 말이며, 민령은 촉에 있는 岷山이다. ‘구지에서 살고 싶어 했던 꿈’은 소동파가 꾼 꿈 이야기이다.

 

다섯 마리 말로 진경을 찾던 날 五馬尋眞日

청산은 얼마나 깊었던고? 靑山幾許深

응당 알았으리라! 구름에 잠긴 그 속에, 應知雲沒裏

간간히 풍경소리 층진 봉우리에 떨어지는 것을. 踈磬落層岑

 

돌다리 절벽에 걸려 길 더욱 위태한데, 石磴懸崖路轉危

막대 짚고 읊조리며 나막신 신은 느릿느릿한 걸음. 吟笻蠟屐步遲遲

멀리서도 알겠노라! 달 솟고 구름 열린 곳에서 遙知月吐雲開處

그대의 수놓은 비단 詩語 얼마나 구사했는지를. 幾費君侯錦繡辭

 

장항동을 ‘기이한 경치와 그윽한 절경이 남쪽 지방에서 이름을 독차지하는 곳’이라고 평가한 것이나, ‘천지 비경이 간직된 곳’이라는 소개에서도 역시 장항동에 대한 시인의 깊은 애정을 알 수 있다.

앞의 시 오언 절구는 ‘진경을 찾는[尋眞]’에 시상이 집약되어 있고, ‘깊은 청산’, ‘구름에 잠긴 그 곳’ 등이 이 진경을 구체화하고 있으며, ‘간간히 풍경소리 층진 봉우리에 떨어진다’고 하여, 시각적인 표현으로만 끝내지 않고 청각적인 변화를 주고 있다. 뒤의 시 칠언절구는 ‘수놓은 비단 시어[錦繡辭]’에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을 집약하여, 권합의 시를 간접적으로 함께 예찬하고 있다.

다음 시는 「遊獐項洞九咏」의 출발지에서 읊은 시이다.

 

해 저무는 봄 산길 日暮春山路

안개 속에 기이하네. 烟霞望裏奇

오솔길 찾아 가니 行尋小徑去

바로 꽃 지는 시절. 正値落花時

 

이 시는 김성운의 시에 차운한 시이다. 김성운은 퇴암과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석남은 오늘날 행정 구역으로는 산청군 삼장면 석남리이다. 아마 시인은 장항동 유람을 이 석남에서 출발하였던 모양이다. 봄을 장식하던 꽃들도 거의 진, 4월도 중순을 넘어선 때의 해질 무렵, 언뜻언뜻 안개 사이로 보이는 지리산의 절경을 즐기며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다. 4행에서 ‘바로 꽃 지는 시절[正値落花時]’이라고 여운을 단절한 표현이 더욱 산뜻한 느낌을 준다.

다음은 해질 무렵 지리산 인근에서 맛본 정취를 노래하였다.

 

읊조리며 말 타고 흰 구름 향하는데 吟鞭遙向白雲行

한 송이 남은 꽃이 돌 틈에 환하네. 一朶殘花石罅明

저 속의 풍광을 다 보지 못했는데 這裏風光看不盡

문득 싫어지네, 숲속에서 생겨나는 어둠이. 却嫌暝色樹中生

 

이 시도 역시 김성운의 시를 차운한 시이다. 봄이 훌쩍 지났는데도 계절을 잊고 돌 틈에 남아 있는 꽃을 보는 심경은 경이롭다. 이러한 풍광을 더 즐기려는 시적자아의 심정을 몰라보고 어둠이 서서히 몰려오니, 그 어둠이 좋을 수는 없다. 어둠이 싫어지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저 자연 완상을 방해하기 때문일 따름이다. ‘한 송이 남은 꽃이 돌 틈에 환하네[朶殘花石罅明]’는 다음에 언급할 「獐項洞」의 ‘짙푸른 녹음 속에 살짝 가린 연분홍 꽃[綠樹陰中紅影嫩]’과 이미지가 유사하다.

다음 시는 제목도 그대로 「獐項洞」이다.

 

진경 찾아 굽이굽이 산허리 오르니 探眞行色上山腰

세상 밖 기이한 경관 곳곳에 풍요롭네. 物外奇觀處處饒

짙푸른 녹음 속에 살짝 가린 연분홍 꽃 綠樹陰中紅影嫩

흰구름 쌓인 속에 비취빛 어른어른.白雲堆裏翠光搖

쏟아지는 계곡 옥수 천 길 골짜기를 달리고 溪噴玉瀨奔千壑

안개는 옥빛 산을 안고 하늘에 닿았네. 烟擁瓊岑接九霄

한가한 흥 浩然하여 거둘 수 없는데 閒興浩然收不得

풍광은 무릉교와 다투는 듯하구나. 風光爭似武陵橋

 

지금 시적자아가 서 있는 위치가 바로 장항동이다. 오늘날의 위치로 말하면 대원사 입구의 버스 주차장에서 대원사 가는 방향으로 약 500m쯤 되는 곳에 있는 첫 큰 굽이이다. 이 시에서 시적자아는 주변의 환경에 완전히 동화된 상태이다. 물아일체의 경지에 든 것이다. 이러한 흥취는 들뜬 흥이 아니라 유유자적한 가운데 느끼는 흥이다. 그래서 한가한 흥이다. 시적자아의 행위를 집약한 단어는 ‘探眞’이고 찬탄한 경관의 아름다움을 집약한 단어는 ‘기이한 경관’, ‘武陵橋’이다. 기이한 경관의 구체적인 장면이 3-6행이다. ‘짙푸른 녹음 속에 살짝 가린 연분홍 꽃[綠樹陰中紅影嫩]’에서 ‘살짝 가린 연분홍 꽃[紅影嫩]’은 짙푸른 녹음 속에 아직 지지 않고 남아 있는, 계절을 잊고 있는 꽃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규보의 「夏日卽事」에 ‘빽빽한 잎에 가린 꽃은 봄이 지나도 남아 있고[密葉翳花春後在]’와 대비해 볼 만하다. ‘흰구름 쌓인 속에 비취빛 어른어른[白雲堆裏翠光搖]’은 하얀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사이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파란 하늘의 모습을 형상화한 표현이다. 흰구름과 파란 하늘의 색채 대비와 동적 이미지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는 표현이다.

마치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에서 노래한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을 연상하게 한다. ‘뿜어내는 계곡 옥수[溪噴玉瀨]’도 계곡을 의인화하여 새로운 느낌을 주고 있다.

‘안개는 옥빛 산을 안고 하늘에 닿았네[烟擁瓊岑接九霄]’라는 표현은 일상적이고 진부하기 쉬운 소재를 참신하게 표현하여 신선미를 더하였다. ‘안개는 계곡을 따라 피어오르고, 산은 하늘에 닿아 있네.’라고 하였다면 얼마나 진부한 표현이 되었겠는가?

끝행의 ‘무릉교’는 퇴암이 찾고자 하는 이상 세계와도 통한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장항동의 풍경은 무릉교와 다투어도 좋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여기고 있다.

다음은 절벽 위에 있는 소나무를 읊은 시이다.

 

붉고 푸른 절벽 위에 丹崖翠壁上

솔 그림자 절로 흔들리네, 松影自婆娑

우두커니 서서 멀리 보니 佇立窮遐矚

아름다운 풍경 이곳에 많아. 韶光此地多

 

절벽 위에 서 있는 소나무는 한 그루여야 이 분위기에 어울린다.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그림자를 드리운 소나무의 모습에 우두커니 서서 경관을 바라보고 있는 시적자아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아름다운 풍경 이곳에 많아[韶光此地多]’라는 부연 설명에도 불구하고 허전하다. 왜 그럴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山齋寫懷」의 “얼마간 이 속의 덧없는 세상 즐거움은/ 가는 곳마다 맑은 유람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네.”에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 많아서 보고 즐기지만, 이러한 자연완상의 즐거움도 결국은 덧없는 세상 즐거움인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도 시적자아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허전함을 메워주지는 못하고 있다.

다음은 장항동 계곡에서도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대원암을 읊은 시이다.

 

세상 밖 진경을 찾는 나그네 物外探眞客

그윽한 외길을 찾아간다. 行尋一逕幽

물빛은 푸른 산을 머금고 波光含翠岳

꽃빛은 모래강변에 비친다. 花色暎滄洲

학은 천년 나무에서 춤추고 鶴舞千年樹

안개는 백 척 누각 위를 난다. 烟飛百尺樓

등나무 그늘진 정자 위에서 藤陰古亭上

세간의 근심을 모두 씻는다. 消盡世間愁

 

시적자아의 시선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다시 자신의 주변으로 옮아가면서 풍경을 읊고 있다. 서경과 서정이 잘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다. 시적자아는 지금 ‘세상 밖 진경’을 기어이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세간의 근심을 모두 씻고 있다. 物我一體의 상황이다.

계곡을 흐르는 물이 펑퍼짐하게 모여서 잔잔한 수면을 이루는 곳에 산이 비친 모습을 ‘물빛은 푸른 산을 머금고[波光含翠岳]’라고 표현하여, 맑디맑은 모래밭 물가에는 강기슭에 핀 꽃이 어리어 있는 모습과 조화를 이루어 靜中動의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계곡에 즐비한 노송 위에는 간간이 학이 날고, 대원암 높은 누각 위로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이러한 세상 밖 진경을 바라보면서 지금 시적자아는 눈물을 흘리거나 한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세간의 근심을 모두 씻어내고 있다. 주변의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는 궁극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생각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중국 동정호에 있는 악양루는 그 경관이 비할 수 없이 장관인데도 두보는 이 악양루에 올라서 눈물을 흘렸는데, 퇴암은 지금 등나무 그늘진 정자 위에서 세간의 근심을 모두 씻고 있다.

다음 시도 장항동 계곡에서 읊은 시이다.

 

비 그친 산위에 달이 뜨는데 霽色千峰月

우레 소리는 골짜기마다 흐른다. 雷聲萬壑流

단구 나그네가 승지를 찾아 丹丘探勝客

강선루에 기대어 서 있노라. 來倚降仙樓

 

흰 달이 푸른 강물에 맑게 어리니 白月澄虛碧

항아리 속 별천지로구나. 壺中別有天

늘어선 멧부리에는 푸른 눈이 빽빽한데 列峀森靑眼

신선이 노닌 곳은 어디이던가? 仙遊何處邊

 

士重 李佖이 달구경한 시를 차운하였는데, 시적자아가 지금 서 있는 강선루가 어디에 있었던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물 흐르는 소리가 우레 소리처럼 들리고, 흰 달이 푸른 강물에 맑게 어리며, 빽빽하게 늘어선 멧부리가 마치 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는 표현들로 보아서는 장항동 계곡의 어느 한 지점이라고 짐작된다.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밤, 골짜기를 울리며 쏟아지는 계곡 물소리에 단구의 나그네는 강선루 위에서 신선이 노닌 곳을 찾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이 있는 그곳이 신선이 노닌 곳이다. 자연과 시적자아가 서로 분리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가 된 상황이다.

다음은 하동 진교에서 덕산을 향해 가면서 지은 시이다.

 

비갠 두류산 경치가 좋아雨後頭流勝

들쑥날쑥 한 눈에 환하구나.參差入眼明

돌아가는 길이 멀다고 하지 마소. 莫言歸路遠

천리 길 봉래 영주도 찾아가겠소. 千里訪蓬瀛

 

지금 시인은 지리산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한 지점에 서 있다. 비 갠 뒤의 맑고 상쾌한 분위기에서 장엄한 지리산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으니, 맑고 浩然한 기운을 흠뻑 맛볼 것이다. 진교에서 덕산까지는 지름길로 가도 약 40여 km이다. 백 리 길이니, 새벽밥을 먹고 나서도 하루 종일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하지만 그런 거리쯤은 문제될 것이 없다. 이미 맑고 호연한 기운에 흠뻑 젖어 있으니, 봉래산, 영주산도 찾아 갈 것인데 이런 정도의 거리야 무슨 문제가 될 것이냐고 노래하고 있다.

다음은 장항동 주변 진경의 하나인 폭포를 노래한 시이다.

 

뿌린 빛은 천 층의 눈이요 撒色千層雪

포효 소리 골짝마다 우레로다. 吼聲萬壑雷

주저하며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니 踟躕久不去

세상 근심 자연히 재가 되었네. 世慮自然灰

 

폭포 쏟아지는 장관을 보면서, 그 장엄한 장면에 도취되어 오래도록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세상 근심을 다 잊었다. 시적자아는 자연과 하나가 된 것이다. 세상 근심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으니, 재론하지 않는다.

다음은 한적하고 평화스러운 풍경을 노래한 시이다.

 

해질녘 강호의 길을 걷노라니 落日江湖路

풀 우거진 들판엔 지난 흔적 사라졌네. 平蕪掃舊痕

냇가 버들엔 안개가 드문드문 烟分溪柳色

들매화 향기는 퍼져오누나. 香返野梅魂

지친 새는 찬 가지에서 울고 倦鳥啼寒樹

성긴 다듬이 소리 저녁마을에 울린다. 踈砧動暮村

흰 구름 가려서 원근을 모르니 白雲迷遠近

어느 곳이 바로 무릉도원일까? 何處是桃源

 

해질 무렵 강변을 거니는데 냇가 버들가지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들매화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온다. 새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다듬이 소리가 들려온다. 새 울음소리 사이사이에 간간이 다듬이 소리가 들려오는 시골의 저녁 풍경은 마음을 푸근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흰 구름이 가려서 원근을 모르니, 어느 곳이라고 지금 바로 지적할 수는 없지만 이곳 어딘가에 무릉도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시 「獐項洞」에 등장하는 무릉도원은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곳’인 반면에 이 시에 등장하는 무릉도원은 ‘한적하고 평화스러운 곳’이다. 「有懷」에서는 모든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옛날에 기약한 깊은 산’으로나 들어갈까라고 하여, 현실 도피적인 곳을 찾고 있기도 하였지만, 이 시의 무릉도원은 시인이 평화스러운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지친 새는 찬 가지에서 울고[倦鳥啼寒樹]/성긴 다듬이 소리 저녁마을에 울린다.[踈砧動暮村]’는 청각 이미지를 적절하게 배치하여 표현이 새롭다. 그리고 시 전편에는 시각과 후각, 청각이 어울려 감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시는 분위기와 이미지가 陶淵明의 「飮酒詩」 중 제5수와 상관성이 깊다. 다음은 그 시의 후반부이다.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꽃 꺾어들고 采菊東籬下

그윽이 남산을 바라본다.悠然見南山

산기운은 해질녘이 아름답고山氣日夕佳

나는 새들도 서로 함께 돌아오네.飛鳥相與還

이 사이에 참다운 뜻이 있으니 此中有眞意

말로 표현하려 해도 이미 잊었네. 欲辯已忘言

 

해질 무렵 시골의 그윽한 정취, 들매화 향기와 국화꽃, 찬 가지 위에서 지친 날개를 쉬는 새와 날던 새들이 서로 함께 돌아오는 모습 등은 각각의 시가 창작된 시대적 거리와 공간적 차이를 넘어서서 서로 잘 호응하고 있다.

다음 시는 여름철 비갠 뒤의 정경을 노래하였다.

 

솔밭 길 완보하니 한낮에 미풍이 일고 松間緩步午風輕

산에 비 걷히니 여름 기분 시원하다. 山雨初收夏意淸

산 빛 남기 빛, 무한히 좋아 岳色嵐光無限好

석양에 돌아보니 남은 정취 있네. 夕陽回首有餘情

 

여름철 무더운 날씨에 비가 한줄기 내리고 나면, 시원할 뿐만 아니라, 자연 경관은 물로 씻은 듯이 깨끗하다. 석양 무렵 솔밭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이 깨끗한 산빛과 남기빛을 즐기고 있는 선비의 유유자적한 모습이 선명하다.

퇴암의 시에는 강촌을 배경으로 한 시가 세 수 있다. 「江村偶吟」, 「江村早春」, 「江村卽事」가 그것인데, 다음 시는 그 중의 하나인 「江村卽事」이다.

 

석양에 읊고 나니 생각은 끝이 없고 夕陽吟罷思無窮

끝없는 산과 호수 눈앞에 펼쳐진다. 萬里湖山入望中

가로 부는 젓대 한 가락에 가을빛이 저무는데 橫笛一聲秋色晩

강에 가득 바람과 달은 늙은 어부 차지라네.滿江風月付漁翁

 

석양, 산, 호수, 젓대, 가을, 달, 바람 등으로 어우러진 이 시는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분위기이다. 어느 가을 초저녁, 달이 떠오르는 호숫가에서 시를 읊고, 젓대를 부는 시적자아를 상상해 본다. 멋을 알고 낭만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다음 시는 지리산을 유람한 종형에게 준 시이다.

 

두류 첩첩 무궁한 경치 頭流萬疊無窮景

이십 년 전 나와 이미 보았네. 二十年前我已看

경치가 지금도 옛날 같을는지? 物色如今依舊否

응당 채색한 붓끝에 실어 넣어야지.也應輸入彩毫端

 

종형이 지리산을 유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십 년 전에 시인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 다시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옛날에 보았던 그 무궁한 아름다움을 지금도 맛보았는지 되묻고 있다. 아마 이십년 전에 지리산을 유람하였을 때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감탄했던 종형의 모습이 생생한 모양이다.

그 감동적인 장면을 ‘채색한 붓 끝에 실어 넣어야지.’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종형은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모양이다. 감동을 시와 그림으로 함께 표현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다음 시는 눈덮인 덕천 계곡의 겨울 정취를 노래하였다.

 

눈 덮인 산 계곡에 천천히 말을 모니 雪裏溪山策馬遲

가슴 가득한 풍미 누가 알겠는가? 滿腔風味有誰知

신선의 집에서 이 날 맑은 만남 이루니 仙庄此日承淸晤

바로 용문의 경치 완상하던 때로세. 正是龍門勝賞時

 

덕천은 물론 덕천서원이 있는 곳이다. 신명구는 남명의 학풍을 흠모하여 한 때 덕천에서 살았다. 이 시에 등장하는 신선의 집은 차운한 신명구의 집인 것 같다. 이곳에서 서로 만나 우의를 나누고 겨울 정취를 즐기면서 시를 주고받는 장면이다.

용문은 중국 황하의 상류에 있는 지명으로 물살이 세기로 유명하다. 덕천강 강물이 세차게 흐르는 모습을 용문에 비유하여 표현하였다. 퇴암이 지은 시에서 신명구의 시에 차운한 시는 이 외에 「德川書院次申上舍命耈韻」이 한 수 더 있는데, 이 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퇴암의 시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영역이 바로 ‘자연친화’인데, 산림처사로 자처한 퇴암으로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 중에서 「분매」는 말 그대로 화분에 심겨져 있는 매화를 제재로 한 시이고, 나머지는 모두 자연을 대상으로 읊었다. 자연을 대상으로 읊은 시 중에서도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시가 장항동을 배경으로 한 시이다.

장항동은 노루목이라고도 하는데, 지리산의 여러 명승지 중에서도 서부 경남에서는 가장 손꼽히는 절경이다. 경치가 워낙 아름다운 곳이고 보니, 자연히 퇴암이 이곳을 자주 찾게 되었고, 따라서 창작한 시도 많은 것 같다.

이 중에서 특히 「獐項洞」은 눈앞에 전개되는 장관과 아름다운 풍경을 감각적으로 잘 표현하였으며, 「大源庵」에서는 시적자아의 시선 이동에서 동적인 리듬감을 느끼게 한다.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퇴암은 자연과 동화되어 아름다움을 즐기고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누리고 있다. 그리하여 이 속에서는 ‘세간의 근심을 모두 씻고’, ‘세상 근심 자연히 재가 되었다.’

6. 惜別의 情懷

만나고 이별하는 일은 인간 사회에서 늘 있는 일이다. 특히 이별의 情恨은 예로부터 많은 시인들이 즐겨 노래한 소재이기도 하였다. 퇴암의 시에도 이러한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시가 다수 있다.

다음 시는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서운함을 노래한 2수의 연시이다.

 

한 번 이별 지금까지 이십여 년을一別如今二十春

안개 낀 아침 달뜨는 저녁 얼마나 마음 아팠나. 烟朝月夕幾傷神

다행히도 밝은 창 아래서 맑은 가르침 받드니 晴窓幸得承淸誨

가슴속 만 섬 먼지 싹 씻었다네.盪盡胸中萬斛塵

 

아침에 거미가 옷에 붙더니 朝來蟢子着人衣

놀랍게도 공이 사립문 두드리시는 걸 보았네. 驚見吾公叩我扉

자리 쓸고 옷 털고 이야기는 끝없는데 掃席拂衣談未了

지팡이 하나로 돌아가는 북쪽엔 구름이 날아. 一笻還向北雲飛

 

이 시는 두 수 모두 존경하는 李斗光을 만나서 헤어지기까지 시적자아의 내면세계를 노래한 것이다. 첫째 수의 1,2행은 20여 년 간 이두광과 헤어져 지내면서 마음 아팠던 심정을 노래했고, 3,4행은 20여 년 만에 만나서 정담을 나누고 보니, 마음속에 쌓였던 회한이 사라졌음을 말하였다.

둘째 수에서는 1행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날 것임을 예언하는 징조로 거미가 옷에 붙고, 2행에서는 공이 찾아오는 장면을, 3행에서는 대면하여 정담을 나누는 장면, 4행에서는 이별을 보여주고 있다. 1행에 등장하는 거미가 여기서는 반가운 손님이 올 것을 예언하지만, 李賢孫의 「秋日」에서는

 

해질 무렵 기러기는 변방으로 날아가고, 落日雁橫塞

가을 창에서 벌레는 실을 뽑는다. 秋窓蟲吐絲

 

라고 노래하여, 쓸쓸한 가을의 정취를 자아내게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벌레는 바로 거미를 말한다. 어쨌든 첫째 수가 ‘말하기’의 수법을 썼다면 둘째 수에서는 ‘보여주기’의 수법을 썼다. 보여주기의 수법을 씀으로써 시적자아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훨씬 더 호소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둘째 수 마지막 행의 ‘지팡이 하나로 돌아가는 북쪽엔 구름이 날아’에서는 비록 표면에 눈물과 한숨은 단 한 마디도 드러나 있지 않았지만, 시적자아의 내면에 끓어오르는 허전함, 서운함의 정도가 어떠한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다음은 벗 金淳과의 이별을 노래한 시이다.

 

인생이 모였다 흩어짐이 본디 기약이 없어 人生聚散本無期

이별에 임하여 어찌 꼭 훗날을 기약하랴. 臨別何須問後期

가을바람에 노란 국화 피기를 기다려 爲待秋風黃菊發

한 동이 술로 같이 취하는 게 좋은 기약이지.一樽同醉是佳期

 

라고 노래하여, 이별을 하면서 언제 다시 만나자는 기약은 하지 않는다. 기약을 하여도 지키지 못하면 부질없는 약속이 되고 만다. 인생이 본디 그런 것이 아닌가? 그래도 노란 국화꽃이 피는 어느 가을날, 서로 만날 기회가 있어서 한 동이 술로 회포를 풀 날을 기대하고 있다.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에 ‘우리는 말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는 표현이 있다.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는 말은 만나면 다행이고 못 만나도 그만인 태도가 아니라, 반드시 만나야 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런 필연적인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훗날의 일을 어찌 알 수 있느냐, 일이 있으면 못 만날 수도 있지. 그러나 노란 국화꽃이 피고, 술이 있으면 기약하지 않아도 친구와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임을 기대하고 있다. 시인의 느긋한 삶의 자세가 돋보인다.

󰡔퇴암집󰡕 3권에는 「德川留別金伯源序」가 있다. 김순과 이별하면서 쓴 글이다. 이 시와 같은 시기에 쓴 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김순과 이별하면서 쓴 글이라는 점에서 내용상 상통하는 글이다. 퇴암은 김순과 막역한 사이였음을 이 서문에서 짐작할 수 있다. 괄목상대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김순의 학식이 몰라보게 발전했음을 칭찬하면서,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하게 하되, 아는 것을 내면화하고 자랑하여 드러내지 말기를 충고하고 있다. 김순의 학문적 발전에 퇴암이 몹시 감동한 모양이었다. 벗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담긴 글이다. 이러한 벗과의 이별이라면 시 한 수가 없을 수 있겠는가? 아무튼 이 시는 서문과 관계가 깊은 글로 짐작된다.

다음 시는 10여 년 만에 벗을 만난 기쁨과 떠나보내는 아쉬움이 절절이 나타나 있다.

 

두 곳에서 서로 그리워한 지 10년 兩地相思後十載

다시 옛 지인 만날 줄 어찌 알았으리. 那知重對舊知人

바람 맞으며 소매 잡는 정 어찌 다하리? 臨風把袖情何極

달 보며 잔 기울이니 흥이 절로 새롭다. 翫月傾觴興自新

안개 속 버들눈에 성긴 비 내리는 밤 嫩柳和烟疎雨夜

매화 향기 시샘하는 눈에 따뜻한 봄바람.芳梅妬雪暖風春

신선의 말 문득 뜬구름 따라 떠나니 仙鑣忽逐浮雲去

뒤따라 갈 인연 없음을 탄식하노라. 歎息無緣躡後塵

 

차가운 겨울이 가고 이제 막 냇가에 갯버들 눈이 피어나고 매화꽃이 피는 초봄이 되었다. 마침 그리워하던 지인이 10년 만에 찾아왔다. 밤이 깊도록 달빛을 받으면서 술잔을 기울이고 정담을 나누었다. 그러나 이튿날 지인은 훌쩍 말을 타고 떠난다. 10년만에 만난 지인과 단 하룻밤 정담을 나누고는 곧 이별하게 되니, 그 허전함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시는 시어를 구사한 면에서도 신선하다. 5행의 이제 막 피어나는 연두빛 버들눈 위에 안개 비 내리는 봄밤의 장면[嫩柳和烟疎雨夜]은 무척 아름답다. 밤에 연두빛 버들눈이 선명하게 보이겠는가? 안개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상상 속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장면이다. 대상을 어렴풋하게 그려낸 한국화 같다. 李瑱의 시 구절 ‘지난밤 안개가 깊은 나무에 깃들었는데[宿霧夜棲沈樹在]’와 權韠의 시 구절 ‘강어귀 가는 버들은 푸르고 안개는 실 같아[江頭細流綠煙絲]’를 한 구절로 묶어서 감상하는 것 같다.

다음 시는 이별을 노래한 次韻詩이다.

 

빗속에 이별하는 근심 크기 재량 못하니 雨裏離愁浩莫裁

이 속에 마음은 누굴 향해 열렸던고? 箇中襟袍向誰開

보낸 시는 놀랍게도 구슬이 섞인 듯 贈言驚却珠璣錯

좋은 작품 화답하려 해도 재주 없어 부끄럽소. 欲和陽春愧不才

 

1,2행은 이별을 노래한 이여주의 심경에 동조하고, 3행에서는 이여주의 시가 우수함을 칭찬하였으며, 4행에서는 능력에 한계가 있다고 겸손하게 표현하고 있다.

다음 시는 갈암의 죽음을 애도하여 쓴 만시이다.

 

箕子의 洪範九疇 시대에서 멀어지니, 箕疇世遠兮

도가 상실되고 말도 없어졌습니다.道喪言湮

누가 선각자가 되어서 孰爲先覺兮

우리들을 깨우쳐 주겠습니까?啓牖吾人

하늘이 선생을 내시어天生夫子兮

남쪽 지방에서 떨쳐 일어나셨습니다. 奮起南服

흐름을 따라 학문의 근원으로 나아가시고 沿流泝源兮

두루 바른 맥을 찾아 배우셨습니다.旁搜正脈

배워서 경과 의를 이루셨고, 學成敬義兮

공부는 精一함을 다 하셨습니다. 功盡精一

神光은 내면에 넉넉하였고,神光內腴兮

英華는 밖으로 드러났습니다.英華外發

봄처럼 온화하고 가을처럼 엄숙하였으며, 春融秋肅兮

못이 맑은 듯, 산이 우뚝한 듯하였습니다.淵澄岳峙

도는 陶山을 이었고, 道紹陶山兮

식견은 百家를 능가했습니다.識超百氏

布帛처럼 꾸밈없는 문장은布帛之文兮

콩과 조 같은 맛이었습니다. 菽粟之味

 

온 세상이 다 눈 먼 사람이니, 擧世齊瞽兮

누가 그 귀함을 알아 주리요?孰識其貴

북쪽 변방과 호남 지역으로,塞北湖南兮

7년 동안 떠돌아다니셨습니다.漂淪七蓂

 

은택을 입고 돌아오셨으니,蒙霈言歸兮

저 錦水 북쪽이었습니다.彼錦之陽

물은 거울 같고 산은 병풍 같으며, 水鏡山屛兮

따뜻한 방과 시원한 정자가 있었습니다. 燠室凉亭

 

살아서는 순리대로 하셨고,生於焉順兮

돌아가셔도 편안하실 것입니다.沒於焉寧

상서로운 구름 상서로운 기운은, 祥雲瑞氣兮

천만 년 길이 남을 것입니다.萬世千齡

 

소자가 상여끈을 잡음에,小子執紼兮

평소의 생각에 느껍습니다.感念平生

구천에서 일어나지 못하시니,九原不作兮

누가 다시 본받겠습니까?誰復儀刑

의심이 있어도 질문할 수 없고, 有疑莫質兮

과실이 있어도 꾸짖을 분 없습니다. 有過莫督

슬픕니다, 이내 신세여!悵此身世兮

담장을 면하지 못합니다.未免墻壁

부끄럽게 글재주도 없어서,愧我不文兮

문장이 되지 않습니다.辭又不成

그래서 슬픈 마음을 돕지 못하니,無以助哀兮

어찌 제 심정을 다 드러내겠습니까?詎盡心情

 

스승이 돌아가신 뒤에 그 슬픔을 표현한 만장이다. 각 구절은 5자ㆍ4자로 구성되어 있는 楚辭體의 古詩이며, 모두 21구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모두 여섯 장인데, 1장에서는 도가 상실된 시대에 선생께서 태어나셨음을 말하고, 2장은 올바른 학문을 익혀서 陶山의 학맥을 이었음을 말하였다.

3장은 조정의 처사가 공평하지 못하여 선생이 7년간 귀양살이를 하셨음을 말하고, 4장은 귀양에서 풀려나 금양으로 돌아왔음을 말하였다. 5장은 돌아가신 뒤에도 상서로운 자취는 길이 남을 것임을 말하고, 마지막으로 다시 더 가르침을 받을 수 없는 퇴암 자신의 한없는 슬픔을 표현하는 것으로 끝맺었다.

운문의 형식이 잘 정제되어 있고, 단어 선택이 적절하여 문장의 표현이 간결하면서도 절실하며, 스승을 흠모하는 절절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다음 글은 벗 이변과의 인연을 밝힌 서문과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이다.

 

아! 정축년 겨울에 내가 晞陽에서 선생을 따를 그 때, 그대는 동자로서 선생을 모시고 있어서, 내가 다행히 그대를 만나 즐거이 더불어 놀 수 있었소. 당시 그대는 비록 어린 나이인데도 나아가고 물러나며 읍하고 사양하는 예절이 정연하여, 나이 든 성인의 태도를 지니고 있었으며, 시를 배우고 예를 배워 한결같은 뜻으로 고인의 길을 따랐으며, 힘써 노력하여 집안의 가르침을 잃지 않았소.

불행히도 중간에 가산이 기울어 서로 헤어져, 타향살이하면서 끼니를 거른 적이 빈번하였으나, 대처함이 느긋하였소. 세상의 부귀명리를 막연하게 보아, 마치 애초부터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은 사람 같았소. 그 깨끗한 수양과 편안하고 담담한 취향에 대해 내가 깊이 감복하였소. 계사년에 그대가 청송에서 내가 있는 노산의 집으로 찾아와, 여러 날 동안 회포를 풀 수 있었소. 다른 날 다시 금양의 천석 가에서 만나기로 기약했는데, 이때의 이별이 길이 천고의 이별이 될 줄 어찌 알았겠소. 아! 희양에서 손잡고 좋아했던 일이며, 악양에서 옷자락을 잡고 놀던 일이 어제 있었던 일과 같은데, 이미 지난 자취가 되어 버렸소. 슬픈 감회가 가슴을 메우니 사를 지어서 슬픔을 쏟아봅니다. 애사는 다음과 같소.

 

그대의 자질은 순수하고 명민하며惟君之質 純且明兮

그대의 학문은 박식하고 정밀했소. 惟君之學 博且精兮

혹 하늘이 나이를 빌려주었다면 倘使天假之以年兮

성취한 바가 무궁함을 보았으리라. 將見所就之無窮期

 

어찌 모진 태풍이 미친 듯 뒤흔들어 云胡獰颷之狂撼兮

난초가 가을이 되지 않았는데도 먼저 시드는고? 蘭未秋而先萎

옛집은 황량하게 슬픔을 띠고 있고 舊宅荒凉兮帶悽

외로운 난새의 쓰라린 울음 측은하오, 隻鸞酸呌兮堪惻

내 이 이치를 가지고 吾將此理兮

조화옹에게 묻고자 하나 될 수가 없네. 欲問之造化翁而不可得也

 

다행히 뜰의 난초가 싹이 돋고 새로 자라幸有庭蘭茁然而新長兮

거의 꽃 향기롭고 훌륭하네.庶幾芳菲而寧馨

앞으로 가업을 맡을 바가 있으니他日箕裘之托有在兮

이것으로 영령이 위로받으시기를.可以是慰英靈兮

 

이 글은 서문과 만시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고인이 된 이변과의 인연과 교분을 진술하였다. 두 사람은 교분을 나눈 기간이 오래 되었다. 퇴암이 광양에서 처음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을 때부터 이변을 만나 줄곧 사귀어 왔음을 말하였다. 또 이변의 인격과 두 사람 사이의 각별한 관계를 말하고 있다. 이변도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움을 겪었으며, 역량을 제대로 꽃피우지도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점은 퇴암의 인생길과도 닮은 점이 있다.

만시의 자수는 정형이 아니나, 한 구가 7자이고 네 번째 자가 어조사인 초사체의 고시이다.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에서 고인은 자질이 명민하고 박식하였음을 말하고, 2장에서는 이런 인재를 일찍 잃게 하니 조화옹에게 따지고 싶다고 하였으며, 3장에서는 다행히 자제들이 명민하니 가업을 잘 이어가겠다고 하였다.

 

이 절에서 언급한 시는 모두 이별과 사별의 슬픔을 노래하였다. 「奉呈三樂窩李丈斗光二首」는 첫째 수에서 만남을, 둘째 수에서 이별을 노래하고 있는데, 특히 마지막 행 ‘지팡이 하나로 돌아가는 북쪽엔 구름이 날아[笻還向北雲飛].’는 이별의 허전함을 함축적으로 잘 제시하였다. 「奉別金伯源淳」에서는 벗과 이별하면서 애써 기약하지 않지만 언젠가 만날 일이 있을 것을 기대하는 여유가 드러나 있다. 「春日送友人」는 반가운 지인을 만나서 이별하기까지를 노래하였는데, ‘안개 속 버들눈에 성긴 비 내리는 밤[嫩柳和烟疎雨夜]’은 그 표현이 참신하다. 만장 두 수는 모두 죽음을 애도한 만시이다.

Ⅳ. 퇴암시의 특징

1. 내면의 근심을 형상화하였다.

퇴암의 시에는 시적자아의 내면에 자리잡은 근심을 형상화한 작품이 많다. 그 근심은 세상사 때문에 갖는 근심이었고, 공부한 것이 현실 구제에 쓰일 수 없어서 한탄하는 근심이었으며, 경박한 세태에 대한 근심이었고, 스승의 명예회복이 좌절된 데 대한 근심이었으며, 남명학이 단절되려는 데 대한 근심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사사로운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근심이었다.

「大源庵」에서는 대원암 주변의 ‘세상 밖 진경’을 보고서, ‘세간의 근심을 모두 씻는다.[消盡世間愁]’고 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에 동화되는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을 뒤집으면 자연에 몰입하지 않을 때에는 세간의 근심이 늘 퇴암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 된다. 세간의 근심이라면 사사로운 문제 때문에 갖는 근심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 때문에 갖는 근심이다. 시대를 근심하는 지식인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감이기도 한 근심이다.

「德山洞望瀑布」에서도 퇴암의 심경은 「大源庵」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쏟아지는 폭포의 장엄한 모습에 도취되어 ‘세상 근심 자연히 재가 되었네.[世慮自然灰]’라고 노래한 것은 평소에 늘 세상 근심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자연과 동화되는 기쁨을 누릴 때에나 잠시 이러한 근심에서 벗어나 마음의 화평을 누릴 뿐이다. 여기서의 근심도 역시 세상 근심이다. 사사로운 개인의 근심은 아니다. 시대를 걱정하는 지식인으로서 가지는 사회적 근심이다. 先憂後樂하는 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근심이다.

「夏日山亭三首」는 모두 세 수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수에서 시적자아는 성인의 정치를 꿈꾸고, 둘째 수에서는 한적하고 시원한 가운데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는데, 셋째 수에서는 상황이 급변하여, 시적자아가 처해 있는 불우한 상황만 드러내는 시어들이 나와 병든 隱者가 된다. 성인의 정치를 꿈꾸면서 공부를 하지만 그것을 실현할 수 없는 자신의 불우한 현실을 근심하는 병든 은자가 된 것이다.

「아이가 개 한 마리를 얻어서 길렀는데, 다음 해 여름에 집안이 가난한 탓으로 먹일 것이 없어 개를 사육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개를 내보냈는데, 오히려 주인을 그리워하여 가지 않고, 밤에는 사립문을 지키고서 짖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느낀 바가 있어 이 글을 지었다.」에서는 개를 통하여 인간 세태를 풍자하였다. 개는 상황이 급변하여도 정을 버리지 못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쉽게 얼굴을 바꾸는 모습을 한탄한 것이다.

「有懷」에서는 시적자아가 내면의 갈등을 억제하지 못하고 분노가 거의 폭발 직전에 이르고 있다. ‘미친 듯 취한 듯 어리석은 듯[如狂如醉又如癡]’이라고 하여, 퇴암의 시에서는 유일하게 격한 감정을 직접 노출하고 있다. 그만큼 시적자아의 내면은 분노로 끓고 있는 것이다. 분노의 원인은 스승의 명예를 회복하는 복관을 조정에서 번복하여 다시 환수하였기 때문이다.

「德川書院次申上舍命耈韻」에서는 이 지역의 유학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남명 조식의 학통이 정치적 파란으로 말미암아 거의 단절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음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다.

「山齋寫懷」에서는 좋은 일이 많다고 하여도, 그것은 고작 가는 곳마다 맑은 유람 방해받지 않는 정도이고, 이러한 것들이 사실은 덧없는 세상 즐거움이라고 하였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그 자체가 사실은 덧없는 일이라고 한 이 말은 어쩌면 퇴암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번민의 한 부분을 솔직하게 드러낸 말인지도 모른다. 퇴암이 평생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면서 산림처사 생활을 한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자신의 역량과 포부를 펼 수 있는 길이 차단된 상황에서 선택한 어쩔 수 없는 통로였다. 이런 상황에서 즐기는 유람이라면 그 유람이 사실은 덧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春曉梅月」과 「秋夜」에서도 근심에 차 있는 시적자아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2. 학문을 권장하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노래하였다.

퇴암은 주변 사람들에게 학문을 권장하는 시를 쓰고, 여유를 가지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는 시를 썼다. 평생 학문 연구에 진력한 퇴암으로서는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奉和朴君文若經一見贈韻」에서는 자신감을 잃고 방황하는 고향 후배를 격려하고 있으며, 「謹次林丈東說韻」에서는 敬을 부지런히 지키고 함양하면 자신의 중심을 잡는 사람은 될 것이라고 하였다. 「和河君寬夫大觀步申上舍韻見贈」에서는 학문의 요체는 재주가 아니라 노력이니, 학문을 대성하려면 재주 있는 사람보다는 조금은 둔한 사람이 더 낫다고 하면서, 후배 하대관에게 열심히 노력하라고 격려하였다.

「草堂卽事」에서는 여름날 석양 무렵, 비온 뒤의 쾌청한 분위기에서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모습이 드러나 있고, 「夏日山亭三首」의 1,2수에서는 시원한 미풍을 받으며 잠시 낮잠을 잔 뒤 책상을 마주하는 여유 있는 모습이 드러나 있으며, 「偶吟」에서는 작은 일에도 만족하며 유유자적하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和李君㭓除夕韻」에서는 한 해를 다 보내고 섣달 그믐날 밤을 맞이한 소회를 담담하게 표현하였다.

3.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퇴암이 남긴 시 중에서는 자연을 노래한 시가 가장 많다. 산림처사로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긴 시를 많이 썼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이 중에서 「盆梅」는 말 그대로 화분에 심겨져 있는 매화를 제재로 한 시이고, 나머지는 모두 자연을 대상으로 읊었는데,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시가 장항동을 배경으로 한 시이다. 장항동은 노루목이라고도 하는데, 지리산의 여러 명승지 중에서도 서부 경남에서는 가장 손꼽히는 절경이다. 덕천서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며, 남명의 발자취가 많이 묻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경치가 워낙 아름다운 곳이고 보니, 자연히 퇴암이 이곳을 자주 찾게 되었고, 따라서 창작한 시도 많은 것 같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시들은 감정을 과다하게 노출하거나, 자연에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그런 시는 없다. 시인은 그 자연 속에 묻혀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함께 즐기고 있다. 자연 속에 묻혀 아름다움을 즐기는 가운데에서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누리니, 세간의 근심을 모두 씻고, 세상 근심 자연히 재가 된 것이다. 시인과 자연이 하나를 이루는 天人合一, 物我一體의 모습이다. 이 속에서 심성은 자연히 도야되고 덕성은 함양되었을 것이다.

4. 시어의 구사 능력이 뛰어났다.

퇴암의 시는 내면의 정서를 드러내고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고자 노력한 모습이 시의 곳곳에 드러나 있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감각적이고 참신한 표현을 통하여 표현 효과를 배가한 것이다. 퇴암의 문학적 자질이 우수하다는 당시의 평가를 수긍할 만하다.

「春日送友人」의 5행 ‘안개 속 버들눈에 성긴 비 내리는 밤[嫩柳和烟疎雨夜]’은 이제 막 피어나는 연두빛 버들눈 위에 안개 비 내리는 봄밤의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밤에 연두빛 버들눈이 선명하게 보이겠는가? 안개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상상 속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장면이다. 대상을 선명하게 그리지 않고 흐릿하게 그려낸 한국화 같다.

「秋夜」 2행의 ‘낙엽은 바람 따라 빗소리를 내누나.[落葉隨風作雨聲]’는 낙엽이 바람에 날리면서 내는 소리를 빗소리에 비유하고 있다. 감각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호음 정사룡이 평생 득의구라고 자부하였던 ‘산 나무가 함께 우니 바람이 잠시 일어나고[山木俱鳴風乍起]’와 대비해 볼 만하다.

「獐項洞」의 3-6행 ‘짙푸른 녹음 속에 살짝 가린 연분홍 꽃[綠樹陰中紅影嫩]/흰구름 쌓인 속에 비취빛 어른어른.[白雲堆裏翠光搖]/쏟아지는 계곡 옥수 천 길 골짜기를 달리고[溪噴玉瀨奔千壑]/안개는 옥빛 산을 안고 하늘에 닿았네.[烟擁瓊岑接九霄]’는 행마다 감각적 표현이 잘 구사되었으며, ‘안개는 옥빛 산을 안고 하늘에 닿았네[烟擁瓊岑接九霄]’라는 표현은 일상적이고 진부하기 쉬운 소재를 참신한 표현으로 신선미를 더하였다.

「江村早春」의 2-6행 ‘냇가 버들엔 안개가 드문드문[烟分溪柳色]/들매화 향기는 퍼져오누나.[香返野梅魂]/지친 새는 찬 가지에서 울고[倦鳥啼寒樹]/성긴 다듬이 소리 저녁마을에 울린다.[踈砧動暮村]’는 시각과 후각, 청각의 이미지가 복합적으로 구사된 시이다. 가끔씩 우는 새 소리 사이에 간간이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를 상상해 보라. 청각적 조화를 잘 살린 표현이다. 도연명의 「飮酒詩」 중 제5수에 비견할 만하다.

「奉呈三樂窩李丈斗光二首」 중 이별을 노래하고 있는 둘째 수에서는 어디에도 이별, 서운함 등의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특히 마지막 행 ‘지팡이 하나로 돌아가는 북쪽엔 구름이 날아.[一笻還向北雲飛]’는 떠나가는 사람이나 떠나보내는 사람이나 허전함과 아쉬움이 행간에 짙게 드리워져 있으면서도 그런 감정을 직접 드러낸 단어는 없다.

「奉別金伯源淳」에서는 이별과 만남의 기약을 노래하면서도, 애써 만날 날을 기약하지 않는다. 강요된 기약이나, 계산된 만남이 아니라 오고가는 인생길 중에서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기약하고 있으니, 인생이 더 여유 있게 느껴진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고 단언하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보다 이 시의 시적자아가 내면에 함축하고 있는 만남의 기대가 더 간절하게 느껴진다.

「春曉梅月」에서는 소쩍새가 울고, 매화나무에 달빛이 쏟아지고 있는데, 이 장면을 시적자아가 바라보고 있다. 이 시에는 어디에도 시적자아의 번민이나 고뇌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이 시를 읽는 독자에게는 수심에 찬 시적자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Ⅴ. 결론

退庵 權重道(1680-1722)는 조선 숙종 조에 활약한 학자이다. 8세에 소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6세에는 이미 經史子集을 두루 섭렵하여 학문이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다.

18세에는 광양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葛庵 李玄逸을 찾아가 문하생이 되었고, 교도를 받아 학문이 한 단계 더 발전하였다. 퇴암은 스승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이 남달랐으며, 이러한 존경심은 일생을 이어갔다.

퇴암은 효행이 남달랐다. 29세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물과 장을 입에 넣지 않고 섶에 누워 몸을 훼손하면서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居喪을 마친 뒤 퇴암은 세상일에 뜻을 접고 오직 어머니를 봉양하고 독서하는 일에 힘을 썼다. 43세에 갑자기 천연두를 만나 증세가 매우 위독하자 여러 아들에게 연로하신 어머니 봉양을 다하지 못한 불효를 걱정하고, 학업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아버지 晩悟齋 權德輝는 퇴암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권덕휘는 학문 연마에 노력하였으며, 성격이 강직하고 호방하여,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부합되면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유배당한 인사라도 꺼리지 않고 만났다. 그리고 남을 돕기를 좋아하여,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자신의 처지를 잊고 도왔다.

퇴암이 당시 집권 세력으로부터 심한 핍박을 받던 갈암을 찾아가 스승으로 삼고 평생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것은 이미 고난을 같이 할 결심이 서야만 가능한 선택이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 충실한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아버지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퇴암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학문의 영향 못지않게 인격적 감화를 많이 받았다. 급박한 상황에서 조금도 흔들림 없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모습에서 퇴암은 선비가 고난에 처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체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퇴암이 일생을 통하여 산림처사로 자족하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의연하게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승의 이러한 삶의 자세에 영향을 받은 힘도 있었을 것이다.

스승은 노복에게도 항상 온화하게 대하도록 지도하였으며, 당시 사회의 최하층으로 천시 당하던 승려에게도 반듯하게 인간적 대우를 하도록 지도하였다. 스승의 이러한 가르침은 퇴암의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을 공경함은 당시 사회의 선비들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이었다. 퇴암은 이러한 덕목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리고 가난에 굴하지 않고 학문에 진력한 학자로서의 의연한 모습에서, 평소 자기 수행과 연마에 철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퇴암은 18세기 전반기 당시 경상우도 사회에서 학문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息山 李萬敷는 퇴암과 理氣에 관한 여러 학설을 논의한 뒤 퇴암의 학문은 그 폭이 매우 넓고 깊어서, 마땅히 경상우도의 儒宗이라 할 만하다고 하였다. 식산이 퇴암의 성리학적 식견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德泉書院은 南冥 曺植의 제자들과 지역 유림들이 남명을 추앙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따라서 이곳은 이 일대 유학의 본산이라고 할 만한 곳인데, 퇴암은 이 덕천서원의 원임을 역임하였다. 또 당시 쟁쟁한 선비들이 출입하던 덕천서원에서 23세의 젊은 나이에 덕천서원의 강당인 「經義堂重修記」를 써서 문명을 떨쳤다.

퇴암은 퇴계에서 갈암으로 이어진 학통을 충실하게 따랐으며, 성리학의 이론도 理와 氣가 비록 서로 떨어져 있지는 않으나, 각각의 뿌리를 가진 존재로 보았다. 중용에서 말하는 中은 그것이 발현하여서 절도를 지키면 중이 제 자리를 지키지만, 절도를 잃으면 이미 중을 상실하고, 내면에 있는 짝도 중이 될 수 없다고 하였으며, 함양과 존양은 동과 정을 겸한 것이어서, 이를 동과 정으로 나누어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였다.

또 퇴암은 갈암 문하의 여러 제자들 중에서 문학적 자질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퇴암도 한 때는 과거에 응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당시 집권 세력의 배척으로 스승이 사후에도 명예회복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보고 정치에 환멸을 느껴 과거를 포기하였다. 그리고 평생 자기 수양과 학문 연구에 진력하였다. 세상의 영욕을 멀리하고 오직 정신 수양에 노력하였으며, 공명을 뜬 구름같이 여기며 이것이 자신의 삶에 누가 되는 일이 없이 살겠다고 퇴암은 스스로 다짐하면서 일생을 살았다. 이러한 규범적 행동은 학자로서의 위상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집작된다.

퇴암의 시에는 내면의 근심을 형상화한 시가 많다. 그 근심은 사사로운 문제에서 비롯된 근심이 아니다. 사회적인 문제에 근원한 세상 근심이고, 성인의 정치를 꿈꾸면서 공부를 하지만 그것을 실현할 수 없는 자신의 불우한 현실에 대한 근심이며, 쉽게 얼굴을 바꾸는 야박한 세태에 대한 근심이고, 스승의 명예를 회복할 수 없는 정치 현실에 대한 근심이며, 몰락해 가는 남명학에 대한 근심이었다.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가진 근심이었다..

퇴암의 시에는 학문 활동을 권장하고 후학을 격려하는 시들이 있으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유유자적하는 학자적 면모를 찾아볼 수 있는 시들이 다수 있다.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그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심성을 도야하는 시들이 다수 있어, 산림학자로서의 면모를 알 수 있다.

퇴암의 시는 형식 맞추기에나 급급한 그런 시들은 없다. 시어의 구사가 뛰어난 표현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학적 자질이 우수하다는 당시의 평가를 실증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퇴암은, 남명이 만년에 들어와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 전념한 德山과 아주 가까운 지역에서 생장하여 南冥學의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또 퇴계학을 계승한 갈암 이현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퇴암은 당시 유림의 기대에 부응하여, 쇠퇴해가는 남명학을 일으켜 세우고, 경상우도의 학문을 퇴계학과 접맥하여 남명학과 融和시켜서 발전시기고자 노력하였다. 魯溪 李復煥의 말처럼 ‘좀 더 살았으면 학계에 반드시 우뚝 설 수 있을 사람’이었는데, 불행하게도 43세에 세상을 떠난 것은 경상우도 지역 유학 발전의 큰 손실이었다.

 

참 고 문 헌

 

1. 원전 자료

權重道 󰡔退庵集󰡕, 자장본.

金鎭祜 󰡔勿川集󰡕, 자장본.

李玄逸 󰡔葛庵集󰡕, 한국문집총간127-128권, 민족문화추진회.

李 栽 󰡔密菴集󰡕, 한국문집총간173권, 민족문화추진회.

 

2. 논문

許捲洙, 「安分堂 家門의 形成과 展開」,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 제9집, 1999.

李相弼, 「南冥學派의 形成과 展開」, 고려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8.

 

3. 저서

李家源, 󰡔玉溜山莊詩話󰡕, 乙酉文化社, 1972.

李家源, 󰡔韓國漢文學史󰡕, 普成文化社, 2005.

<부록>

󰡔퇴암집󰡕 수록 시문 목록

번호

제 목

형 식

제 재

계절

시간

1

奉和朴君文若經一見贈韻

7언절구

권학

 

 

2

分梅

5언절구

매화

겨울

 

3

江村偶吟

5언절구

강변

달밤

4

題廣濟巖

5언절구

광제암

가을

석양

5

① 次太守權公郃遊獐項洞韻二首幷序

5언절구

장항동

 

 

② 次太守權公郃遊獐項洞韻二首幷序

7언절구

장항동

 

 

6

偶吟

5언절구

전원

생활

석양

7

遊獐項洞九咏

① 石南次金大集聖運韻

5언절구

장항동

석양

② 又次金大集躑躅花韻

7언절구

철쭉꽃

 

석양

③ 獐項洞

7언율시

장항동

 

④ 獐項洞松下

5언절구

장항동

 

⑤ 大源庵

5언율시

대원암

 

⑥ 降仙樓次李士重佖觀月韻二首 1

5언절구

달밤

 

달밤

⑦ 降仙樓次李士重佖觀月韻二首 2

5언절구

달밤

 

달밤

⑧ 陳橋向德山

5언절구

두류산

 

⑨ 德山洞望瀑布

5언절구

폭포

 

8

江村早春

5언율시

강촌

석양

9

雨後登山

7언절구

비갠산

여름

석양

10

春曉梅月

7언절구

매화

달밤

11

① 夏日山亭三首 1

7언절구

한정

여름

석양

② 夏日山亭三首 2

7언절구

한정

여름

석양

③ 夏日山亭三首 3

7언절구

근심

여름

12

秋夜

7언절구

야경

가을

달밤

13

江村卽事

7언절구

강촌

가을

달밤

14

草堂卽事

7언절구

초당

여름

석양

15

① 奉呈三樂窩李丈斗光二首

7언절구

만남

 

 

② 奉呈三樂窩李丈斗光二首

7언절구

이별

 

 

16

謹次林丈東說韻

7언절구

권학

 

 

17

奉別金伯源淳

7언절구

이별

 

 

18

庚子夏永嘉宗兄翕遊頭流訪余搆一絶仰呈

7언절구

두류산

여름

 

19

德川次申上舍命耈韻

7언절구

겨울

20

和河君寬夫大觀步申上舍韻見贈

7언절구

권학

 

 

21

和李君除夕韻

7언절구

제석

겨울

22

兒輩得一犬子飼養翌年夏以家貧食小不能飼養犬也猶戀主不去夜必守柴門吠不輟感而有作

7언절구

여름

23

山齋寫懷

7언율시

전원

 

24

德川書院次申上舍命耈韻

7언율시

덕천

서원

 

 

25

有懷

7언율시

갈등

 

 

26

春日送友人

7언율시

이별

27

次李白玉如珠見贈韻

7언절구

이별

 

 

28

葛庵先生挽

 

애도

 

 

29

李君㭓哀辭幷序

 

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