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진나라가 두려워한 신릉군(信陵君  

신릉군(信陵君) 무기(無忌)7대 위소왕의 막내 아들로 위안리왕의 배다른 아우이다. 위소왕이 죽고 안리왕이 즉위하자 왕은 아우 무기를 신릉군에 봉하였다.

신릉군은 사람됨이 인자하고 겸손하여 현명하든 불초하든 구별 없이 선비들을 모두 예로써 교제하였으며, 자신이 부유하고 귀한 신분이라고 하여 남에게 교만하게 굴지 않았다. 신릉군의 이러한 인품이 천하에 알려지자 사방 수 천리 밖에서부터 내노라고 하는 인사들이 다투어 신릉군에게 달려가니 식객이 3천 명이 넘었다. 신릉군의 현명함이 천하에 알려져서 수많은 식객들이 돕고 있기 때문에 10여 년 동안 이웃 나라에서도 감히 병력을 동원하여 위나라를 도모하려는 생각을 품지 않았다.

진소양왕이 군대를 보내 위나라가 위기를 넘긴 과거 역사를 알고 있는 위안리왕은, 앞으로 진나라의 힘을 빌어서 한나라에 잃었던 옛 땅을 되찾으려 하였다. 이것을 안 신릉군은 다음과 같이 왕을 설득하였다.

진나라와 융적은 탐욕스럽고 사나우며 이익을 좋아하고 신의가 없습니다. 이익이 있으면 금수와 같이 친척 형제도 돌보지 아니하는 줄은 천하가 다 아는 바입니다. 지금 진나라 군주는 누구보다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외삼촌 양후(穰侯)를 끝내 축출하였으며, 두 아우는 죄가 없는데도 그들의 영지를 빼앗았습니다. 일가 친인척에게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다른 나라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왕께서 진나라와 함께 한나라를 친다면 진나라의 환란을 더욱 가까이 불러들이는 일이니, 신은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지금 한나라는 군주가 어려서 모후가 청정을 하고 있으니, 안으로는 민심이 안정되어 있지 않고, 밖으로는 강성한 진나라와 위나라의 병력을 마주하고 있어, 언제 망할지 모릅니다. 한나라가 진나라에 망하면 그때부터는 우리 대량이 바로 진나라와 인접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나라가 망하고 나면, 우리 위나라는 진나라의 공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진나라가 형택의 물을 터서 대량에 수공을 가하면 대량은 반드시 망합니다.

왕께서 보내신 사자가 진나라에 가서 안릉군을 미워하는 말을 자주 하니, 진나라가 안릉군을 벌주고자 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진나라가 안릉씨를 망하게 하면, 남국이 반드시 위태로운데 우리나라에 해가 없겠습니까?

한나라를 미워하고 안릉씨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괜찮지만 진나라가 남쪽 나라를 싫어하는 것을 근심하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지난 날 진나라가 황하의 서쪽에 있을 때는 대량을 지나 천리 밖이었고, 황하와 산이 그들을 막고 있었으며, 주나라와 한나라가 우리나라와의 사이에 있어서 방패가 되었습니다. 숲속에서 일어서기 시작한 시골 군인들이 지금에 와서는 우리 위나라를 7번 공격하여 다섯 번 대궐의 정원을 점령하였으며, 진나라에 빼앗긴 큰 현이 수십 개, 이름 있는 도시만도 수백 개입니다. 진나라가 대량의 서쪽 천리 밖에 있을 때도 화가 이와 같았는데, 진 나라를 가로 막는 황하와 산이 없고, 방패막이가 되는 한나라도 없어지면 대량과의 거리가 고작 백리 밖이니, 큰 화가 반드시 미칠 것입니다.

진나라는 천하의 나라를 모두 병합하여, 해내(海內)를 신하로 삼기 전에는 침공을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왕께서는 속히 초나라와 조나라의 맹약을 받아들이시고, 한나라를 보존하면서 한나라에서 보낸 인질을 붙잡아 두고서 옛 땅을 요구하면 한나라는 반드시 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의 수고를 거치지 않고도 옛 땅을 얻게 되니, 그 공은 진나라와 함께 한나라를 치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한나라를 보존하여 우리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천하를 이롭게 하는 길입니다. 한나라는 반드시 우리나라를 중시하고 두려워하며 배반하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 우리나라의 속현이 될 것입니다.

지금 한나라가 존속하지 못하면 두 주나라와 안릉이 반드시 위험하며, ·조가 대파되고, (제가 매우 두려워하여, 천하가 모두 진나라로 달려가 신하가 되는 날이 멀지 않을 것입니다.”

해박한 지식으로 작금의 국제 정세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소상하게 설명하니, 위왕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진나라와 함께 한나라를 정벌하려던 생각을 버렸다.

어느 날 신릉군이 위왕과 바둑을 두는데 북쪽 국경에서 봉화가 올랐다는 전갈이 왔다. 왕은

조나라 군사가 침공하여 국경 안에 들어왔구나.”

라고 하면서 두던 바둑을 그만 두고 대신을 불러서 의논을 하려 하였다. 신릉군은 왕에게 대신 소집을 만류하면서

조왕이 우리나라 변경에 들어온 것은 사냥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침략하는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고는 다시 바둑을 전과 같이 두는데, 왕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어서 공자와 바둑을 둘 수가 없었다. 조금 지나자 다시 북쪽에서 전갈이 오기를

조왕이 변경을 들어온 것은 침략이 아니라 사냥 때문이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위왕은 침략이 아니라는 말에 일단은 안도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신릉군의 예측력에 놀라 물었다.

신릉군은 어떻게 그것을 알았소?”

신의 식객 중에 조왕의 움직임을 잘 아는 사람이 있는데, 비밀리에 살펴보면서 조왕이 하는 일을 신에게 알려줍니다. 신은 이 때문에 조왕을 잘 압니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위왕은 신릉군의 능력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국정을 맡기지 않았다.

위나라에 후영(侯嬴)이라고 하는 은사가 있었다. 나이가 70에 집안이 가난하여 도성인 대량성의 이문을 지키는 일을 하였다. 도성에는 많은 출입문이 있는데, 그 중에서 동쪽에 있는 문을 이문(夷門)이라고 하였다. 신릉군이 후영의 명성을 듣고 찾아가서 만난 다음 후한 예물을 보내니, 후영은 예물을 받지 않고 말하기를

소생이 수십 년 동안 몸과 행실을 닦으면서 살아왔는데, 성문을 지키면서 곤궁하게 산다고 하여 까닭 없이 공자의 재물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예물을 보내는 것으로 후영의 마음을 살 수 없음을 안 신릉군은 큰 연회 자리를 마련하여 이곳에 후영을 초대하기로 하였다. 연회가 열리는 당일, 신릉군은 후영을 맞이하기 위해서 스스로 수레를 몰고서 왼쪽 자리를 비워둔 채 이문으로 갔다. 신릉군의 뒤에는 수행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관문을 지키던 후생은 낡고 해진 의관 차림 그대로 신릉군이 권하는 수레의 빈자리에 조금도 사양하는 빛이 없이 앉았다. 후생을 태운 신릉군은 더욱 공손한 자세로 수레를 몰았다. 수레를 몰고 가는 공자에게 후생이

저자의 푸줏간에서 소생을 기다리는 손이 있는데, 잠시 수레를 돌려서 그곳으로 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신릉군은 흔쾌히 응답하고 수레를 몰고 저자의 푸줏간으로 갔다. 수레에서 내린 후생은 푸줏간 앞에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신릉군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한참 동안 이야기에 열중하였다. 가끔씩 후생이 먼빛으로 신릉군의 기색을 살펴보니 공자의 얼굴빛은 더욱 온화하였다.

후생이 만난 사람은 주해(朱亥)라는 인물인데 고기를 다루면서 세상을 피해 사는 은사였다. 연회장에서는 장상과 종실의 빈객이 당에 가득하여 신릉군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신릉군은 저자에서 수레 고삐를 잡고 있었으니, 신릉군을 수행하던 사람들은 모두가 후생의 무례함을 욕하였다. 한참을 지난 후 후생은 객과 작별의 인사를 나눈 다음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수레에 올랐다.

연회장에 도착하자 신릉군은 후생을 인도하여 상좌에 앉히고 두루 빈객에게 인사하니 참석한 빈객들은 모두 놀랐다. 늙고 초라하여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공자가 깍듯이 예를 표하니 참석한 빈객들은 얼떨떨하였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신릉군은 일어나 후생의 앞에서 장수를 비는 잔을 올렸다. 이어서 후생이 신릉군에게 말하기를

오늘 소생은 공자께서 만족하실 만한 일을 했습니다. 이문의 문지기에 불과한 소생에게 친히 수레를 몰고 왕림하시고, 많은 사람들이 널리 앉아 있는 가운데로 소생을 인도하시었으며, 꼭 가셔야 할 곳이 아닌데도 소생의 친구가 있는 곳을 가셨습니다. 소생이 저자에서 친구와 오랫동안 이야기하는 동안 공자께서는 수레에서 기다리고 계셨으며, 이러한 모습을 저자 사람들이 모두 보았습니다. 공자께서 하시는 모습을 본 저자 사람들은 모두 공자께서 진실로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는 장자라고 여기고, 신을 보잘 것 없는 소인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신은 공자를 위해서 일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연회가 파한 뒤에 후생이 신릉군에게

소생이 푸줏간을 찾아가 만난 주해는 현명한 사람인데, 세상이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푸줏간에 숨어서 한가하게 세월을 보냅니다.”

라고 하였다. 후영의 말을 들은 신릉군은 이후 푸줏간을 찾아가서 여러 차례 주해를 만났으나, 돌아설 때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아 신릉군은 그를 괴이한 사람쯤으로 여겼다.

진소양왕의 군대가 장평에서 조나라의 40만 대군을 몰살하고, 이듬해에는 도성 한단을 포위하였다. 위나라와 조나라 공실은 인척간이다. 신릉군의 누이가 조혜문왕의 아우 평원군 조승의 부인이니, 평원군과 신릉군은 처남남매간인 셈이다. 다급한 조나라는 여러 차례 위안리왕과 공자 신릉군에게 서찰을 보내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위왕은 장군 진비에게 10만 군사를 주어서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진왕은 위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과인이 조나라를 공략하여 이제 함락 시기가 아침저녁입니다. 지금 조나라를 구원하는 제후가 있다면 조나라를 빼앗은 다음에는 맨 먼저 그 나라를 공격할 것이오.”

라고 협박하였다. 위나라의 병력으로는 이미 진나라를 감당할 수 없음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다. 만약 조나라를 도우려 들다가 진나라의 미움을 받아 공격을 받게 된다면 사직의 보존이 위태로운 일이다. 내 나라를 위기에 몰아넣으면서까지 사돈의 나라를 도와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위왕은 사자를 장수 진비에게 보내서 군사들을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게 하고, 업에 머물면서 사태를 관망하게 하였다. 명목은 조나라를 구원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양다리를 걸칠 셈이다. 구원군을 재촉하는 사자가 줄을 이었지만 위나라의 구원군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조나라의 평원군은 구원군을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위나라 신릉군에게 사람을 보내어 꾸짖기를

이 승이 귀국과 혼인한 것은 공자께서 고매한 의리를 지닌 분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잘 구해주기 때문이었소. 지금 한단이 진나라에 항복하는 시기가 아침저녁이 되게 되었는데도 위나라의 구원병은 오지 않으니, 남의 곤경을 보고도 구경만 하는 것이 공자의 본모습이오? 공자께서 승을 가볍게 여기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진나라에 항복하게 되면, 남아 있는 공자의 누이는 노예의 신세를 면할 수 있겠소?”

평원군의 질책을 들은 신릉군은 몹시 괴로웠다. 위왕에게 여러 차례 구원병을 보낼 것을 청하고, 빈객들이 백방으로 왕을 설득하였다. 하지만 위왕은 진나라가 두려워 끝내 신릉군의 말을 듣지 않았다.

신릉군은 왕의 허락을 받아 구원병을 보내기는 틀렸다고 생각하여, 빈객 중에 자원하는 사람을 모아 전차 100여 승을 마련하여서 조나라 구원군을 편성하였다. 진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죽기로 결심하였다.

이문을 지나가면서 마지막으로 후영이나 만나보고 가려고 찾았다. 조나라와의 의리를 위하여 진나라 군대와 싸우다 죽겠다는 뜻을 말하고 돌아서는데, 후영이

공자께서는 힘껏 싸우십시오, 소생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잘 가라는 인사말도 없었다. 신릉군은 몇 리를 가면서도 불쾌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후생을 대우하여 예를 갖춘 것은 천하가 다 아는데, 지금 내가 죽으려 간다는 데도 한 마디 작별의 인사말도 없으니 내가 무슨 실수를 하였기 때문인가?”

공자는 가던 행렬을 돌려서 다시 수레를 이끌고 후영에게 가서 사유를 물었다. 후영이 웃으면서

저는 공자께서 돌아오실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공자께서 지금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진나라 군과 싸우러 가시니, 비유하면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100여대의 전차와 빈객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공자께서는 신을 후하게 대우하시었는데, 공자께서 가시는 길에 신이 전송의 말씀 한 마디 하지 않았으니 마음에 맺히신 바가 있어 다시 되돌아오실 것을 알았습니다.”

후영의 혜안에 감복한 신릉군은 재배하고 이어서 대책을 물었다. 후영은 사람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군사 명령을 전하는 병부(兵符)는 항상 왕이 거처하시는 내실에 있다고 합니다. 왕의 측근 중에서 가장 총애를 받는 분은 여희이니, 내실 출입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이고, 여희라면 그 병부를 훔칠 수 있습니다. 지난 날 여희의 아버지가 피살을 당했을 때 여희는 범인을 찾고자 3년을 노력하였고, 왕에서부터 말단 관리에 이르기까지 여희의 원수를 잡고자 애를 썼으나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이 맺힌 여희는 마지막으로 공자께 아비를 죽인 원수를 잡게 해 달라고 울면서 호소하였고, 이청을 받아들인 공자께서는 객을 시켜 그 원수를 찾아 머리를 베어 여희에게 바쳤다는 소문은 이 나라 안에 사는 사람은 모두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여희는 지금도 이 은혜를 잊지 못하고 있을 것이며, 이 은혜를 갚기 위해서는 죽음도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자께서 진실로 한 번 여희에게 병부를 부탁하면 여희는 반드시 허락할 것이며, 병부를 얻어 진비의 군사를 인수받으면 북쪽으로 가서 조나라를 구원하고 진나라를 물리치시어 오패의 위업을 본받으소서.”

지금 신릉군이 데리고 가는 100여명의 군사로 진나라를 대적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이니, 대규모 군사를 움직여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 업에 주둔하고 있는 진비의 군대를 움직여야 하는데, 이 군사를 움직이려면 왕명을 표시하는 병부가 있어야 한다. 후영은 신릉군에게 병부를 훔쳐서 업에 주둔하고 있는 조나라 군사를 인계받아 위나라 구원에 나서되, 여희를 움직여서 병부를 훔치도록 하라는 계책을 말하였다. 신릉군은 이제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후영의 말대로 여희에게 사정을 말하고 병부를 요청하니, 여희는 과연 왕의 침실에서 병부를 훔쳐내어 신릉군에게 주었다. 병부란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부절이다. 전국시대는 물론이고 한나라 때까지만 하여도 왕이 신하에게 병권을 주거나 군대를 일으킬 때 사용하는 믿음의 표시물로 이 병부를 사용하였다. , , 옥 등으로 주조하여 호랑이 모양을 만들기 때문에 호부(虎符)라고도 하는데, 두 쪽으로 나누어 한 쪽은 왕이 보관하고 한쪽은 장수에게 주었다. 군대를 일으킬 때는 반드시 사자에게 부절을 보내서 장수가 이를 맞추어 일치해야 왕명임을 확실히 알고 행동하였다. 병부를 받아 든 공자는 진비를 만나기 위해서 업으로 가려는데 후영이

장수가 밖에 있으면 때로는 군주가 명령하여도 듣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야 나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공자께서 진비를 만나시어 병부를 내어 보여도 진비가 공자께 병력을 주지 않으면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신의 친구 주해는 이런 일을 함께 할만한 사람으로 힘이 천하장사입니다. 진비가 말을 들으면 다행이고, 듣지 않으면 주해를 시켜서 없애야 합니다.”

여의치 않으면 진비를 죽여야 한다는 후영의 말을 듣고, 신릉군은 눈물을 흘렸다. 후영이

죽음이 두려우십니까? 어찌하여 우십니까?”

진비는 나라를 위해서 평생을 전쟁터에서 지낸 장수인데, 그를 죽여야 한다니 이 때문에 웁니다. 어찌 내 죽음이 두렵겠습니까?”

신릉군은 주해에게 사유를 말하면서 동행을 요청하였다. 신릉군의 말을 들은 주해는 웃으면서

소인은 지금 시정에서 칼을 잡고 짐승이나 도살하는 보잘 것 없는 자인데, 공자께서는 친히 여러 번 저를 방문하셨습니다. 그 때마다 소인이 인사를 드리지 않은 것은 그것이 소용없는 작은 예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공자께서 명운이 걸린 일을 하시게 되니 이제 소인이 명령을 받들 때입니다.”

라고 흔쾌히 동행을 약속하였다. 후영이 작별의 인사를 하면서

소인이 마땅히 따라가야 하나 늙어서 쓸모가 없습니다. 공자께서 가시는 날을 헤아려서 진비의 군대에 도착하시는 날, 북향하고 절하여서 송별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신릉군은 병부를 가지고 업으로 갔다. 진비를 만나서는 위왕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병부를 보였다. 진비는 부절을 합해보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신릉군을 보고

지금 저는 10만 병력을 거느리고 국경 가에서 주둔해 있는 나라의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공자께서는 단 한 대의 수레를 타고 오시어 저의 임무를 대신하려 하시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좋게 말해서는 뜻을 이룰 수가 없다는 판단이 들자 주해는 소매에서 40근 철추를 꺼내어 진비를 쳐서 죽이고, 공자는 드디어 진비의 군사를 인수하였다. 군사를 통솔하게 되자 전군에 명령을 내려

아비와 자식이 같이 군에 온 집은 아비가 돌아가라. 형제가 함께 군에 온 집은 형이 돌아가라. 독자로서 형제가 없는 자는 돌아가서 부모를 봉양하라.”

이렇게 하니 남은 병력이 8만이었다. 신릉군이 백성들의 어려움을 진심으로 걱정함을 안 병사들은 감격하여 죽음으로 적과 싸우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사기가 충천한 병력으로 진격하여 진나라 군사를 치니 진나라 군사는 쉽게 후퇴하고, 드디어 풍전등화의 한단을 구해내었다. 조효성왕과 평원군은 직접 도성 밖에까지 나와서 신릉군을 맞이하였다. 조왕이 재배하며

예로부터 현인이 많았지만 공자에 미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였다. 한편 신릉군과 작별한 후영은 신릉군이 진비의 군대에 이르렀을 때쯤에 북향하고 자결하여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신릉군이 병부를 훔쳐서 진나라 군사를 공격하고 진비를 죽인 일 때문에 위왕은 격노하였고, 신릉군 또한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잘 알았다. 전쟁이 끝나자 위나라 장수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려 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신릉군은 빈객과 함께 조나라에 남았다. 조효성왕은 신릉군의 은덕을 생각하여 5성을 봉지로 주기로 계획하였다. 이 소식을 듣자 평소에 침착하고 공손하던 신릉군도 교만하고 자랑스러운 빛을 보이면서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는 기색이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빈객 중의 한 사람이 신릉군에게

일에는 잊을 수 없는 것이 있고, 잊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남이 공자께 베푼 덕은 공자께서 잊어서 안 될 일이며, 공자께서 남에게 베푸신 덕은 빨리 잊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왕명을 속여서 진비의 병력을 빼앗아 조나라를 구한 일이 조나라에는 공이 되지만 위나라에는 충성스런 일이 못됩니다. 공자께서 지금 이 일을 공으로 여기시는 빛이 보이니, 제가 생각하건대 공자께서 취해서는 안 될 일로 보입니다.”

표현은 완곡하지만 성 5개를 받게 되었다고 우쭐대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말임을 왜 모르겠는가?

빈객의 말을 들은 신릉군은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자책하였다. 조왕이 신릉군을 빈객으로 맞이하여 주인의 예로써 인도하는데, 신릉군을 높여서 서쪽 계단으로 인도하니 신릉군은 옆으로 가면서 그 길을 사양하고 동쪽 계단을 따라서 올랐다. 연회의 자리에서 신릉군은 자신이 저지른 죄과를 말하여, 위나라에 죄를 졌기 때문에 조나라를 위한 일이 결코 공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신릉군의 이러한 태도에 조왕은 저녁이 되도록 5성을 신릉군에게 바치겠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조왕은 신릉군에게 탕목읍(湯沐邑)으로 호읍을 주었다. 탕목읍이란 말 그대로 해석하면 목욕하고 머리감는 비용을 공급하는 읍이라는 뜻이니, 신릉군의 생활비용을 공급하는데 쓰라고 봉한 고을이다.

신릉군은 위나라에 있을 때부터 조나라에 현명한 인사가 두 사람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조나라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 현사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한 사람은 모공(毛公)인데 도박꾼의 무리에 섞여서 지내고, 또 한 사람은 설공(薛公)인데 술파는 집에 묻혀서 지냈다. 신릉군이 이 두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데, 두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어 만나고 싶어 하지 않자, 은밀히 찾아가서 한가하게 노닐면서 세상사를 이야기하고 즐겼다.

평원군이 이 소문을 듣고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부인의 아우 공자가 천하에 둘도 없는 현자로 알았는데, 이제 들으니, 망나니 같은 도박꾼과 술파는 무리들과 어울려 논다고 하니 공자는 망령이 든 사람이오.”

남편으로부터 아우를 비난하는 말을 들은 부인이 들은 대로 신릉군에게 말했더니, 신릉군은 누이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일어서면서

누님, 평원군이 현명한 사람으로 알았기 때문에 제가 왕을 등지면서까지 조나라를 구원하였습니다. 그런데 평원군이 기리는 사람들이란 고작 호걸스런 사람들뿐이고 현자는 찾지 않습니다. 저는 대량에 있을 때에도 이 두 사람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들었고, 조나라에 와서는 이 분들을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했으며, 그들을 만나서 같이 노닐면서는 그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오히려 두려워하는데, 지금 평원군은 제가 이 분들과 사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니, 평원군은 사람을 보는 역량이 부족한 사람이오.”

라고 하면서 행장을 차려서 떠나려 했다.

아우의 말을 들은 부인은 놀라서 이 말을 모두 평원군에게 전했다. 신릉군이 떠나려 한다는 말에 평원군은 직접 찾아가 관을 벗고 사죄하며 충심으로 만류하였다. 평원군의 문하에 있던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반은 평원군을 떠나 신릉군에게 돌아갔으며, 천하의 선비들도 다시 신릉군에게 모여들기 시작하니, 남의 나라에 얹혀사는 신릉군의 빈객 수가 평원군의 빈객 수와 어금버금하게 되었다.

신릉군이 조나라에 머문 지 10년이 되도록 돌아가지 않으니, 진나라에서는 신릉군이 조나라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는 병력을 내어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진나라의 공격을 받게 된 위왕은 놀라서 사자를 신릉군에게 보내서 귀국을 요청하였다. 그렇지만 신릉군은 왕에게 저지른 죄를 생각하니 두려워 왕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문하에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위왕의 사자를 나에게 안내하는 자는 죽이겠다.”

라고 하여 아예 사자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신릉군의 빈객은 모두 위나라를 등지고 조나라로 온 사람들이니, 감히 신릉군에게 위나라로 돌아갈 것을 권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모공과 설공 두 사람이 신릉군을 찾아가서

조나라에서 공자를 소중한 분으로 여기고 있고, 공자의 명성이 제후들에게 널리 나 있는 것은 위나라가 엄존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다급한데도 공자께서 걱정하지 않으시니, 진나라가 대량을 격파하고 선왕의 종묘를 파괴하고 나면 공자께서는 어디에 얼굴과 시선을 두고 서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신릉군은 얼굴빛을 바꾸며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수레에 멍에를 매어서 위나라로 달려갔다.

위안리왕과 신릉군은 만나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정신을 수습한 왕은 상장군의 인을 신릉군에게 주었고, 신릉군은 위나라 군사를 통솔하는 장수가 되었다. 신릉군은 사방 제후에게 사자를 보내었다. 각국의 제후는 신릉군이 장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위나라를 구하기 위한 병력을 보냈다. 이렇게 하여 다섯 나라의 병력이 모였다. 신릉군은 이 병력을 통솔하여 황하 밖에서 진나라를 격파하였고, 진나라 장수 몽오는 신릉군이 이끄는 연합군을 감당할 수 없어서 달아났다. 승리의 기세를 탄 연합군은 진나라 군사를 함곡관까지 몰아붙였고, 이후 진니라 군사는 감히 함곡관을 나오지 못하였다. 신릉군의 위엄은 천하에 떨쳤으며, 빈객이 병법을 바치면 신릉군은 모두 그것에 이름을 붙였는데, 세상에서는 이것을 모아 위공자병법이라고 하였다.

이즈음의 진나라는 왕위 계승이 혼란스러워 진소양왕 다음에 즉위한 진효문왕이 즉위한 당년에 죽고 진장양왕이 즉위하였다. 이 사건에 얽힌 이야기는 진나라편 시황제에 자세히 실려 있다. 신릉군이 연합군을 이끌고 진나라를 황하 밖으로 몰아낼 당시 위나라 태자 증이 진나라에 인질로 있었는데, 진장양왕은 위나라 때문에 노하여 인질로 있는 태자 증을 구속하려 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신하가 왕에게

위나라가 우리나라를 공격하기 때문에 왕께서 노하시어 증을 구속하면, 위왕은 노하여 우리나라를 더 격렬하게 공격할 것이니, 우리는 이 과정에서 반드시 다치게 됩니다. 이런 일은 이웃 나라들이 마음속으로 바라는 일이 됩니다. 차라리 증을 귀하게 대접하여, 이웃 나라들이 위나라를 의심하게 하는 것이 더 나은 방책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미 감정의 개입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적보다 나은 위치를 점유하느냐 만이 문제였다. 진장양왕은 신하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증을 구속하지 않고 더 후하게 대접하였다.

진나라에서는 신릉군이 그 자리에 있는 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이간책을 쓰기로 하였다. 신릉군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은 진비의 유족과 진비의 빈객들이다. 진나라는 황금 만 근을 구하여 이들에게 보내서 신릉군을 헐뜯는 일에 이 비용을 쓰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위왕에게는 매일같이 신릉군을 헐뜯는 말들이 들려왔다.

공자가 외국에 10년 동안 망명하여 있다가 지금 위나라 장수가 되었는데, 제후들은 위공자의 명성만 들었을 뿐 위왕의 이름은 듣지 못합니다. 공자는 민심을 등에 업고 남면하여 왕이 되고 싶어 하며, 제후들은 공자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감히 반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위왕의 귀에 들려오는 말들이란 대체로 이와 같이 공자가 왕위를 찬탈할 것이라는 내용들이었다. 진나라에서는 첩자로 하여금 신릉군이 왕이 된 줄 착각하고 축하하는 위계를 꾸며서 위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매일 같이 이런 말을 들으니 위왕은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결국 공자가 가지고 있던 장수인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말았다.

공자는 모함을 당한 결과임을 알고 병이 들었다고 핑계를 대면서 입조하지 않고 빈객과 더불어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냈다. 밤낮 마시고 즐기는 생활로 4년을 보내니 신릉군은 마침내 술병으로 죽고, 그 해에 위안리왕도 죽었다.

진나라는 신릉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몽오로 하여금 위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20개 성을 빼앗고 처음으로 동군을 설치하였다. 그 뒤 진나라는 조금씩 위나라를 잠식하여 18년만에 위왕을 사로잡아 나라가 멸망하였다.

사마천은 신릉군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내가 대량의 유적지를 지나면서 이른 바 이문을 찾아서 물으니 이문은 성의 동문이었다. 천하의 많은 공자들이 선비를 좋아 하였으나 신릉군은 암혈에 숨어 있는 사람을 접촉하고 아랫사람과 사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 명성이 제후들에게 으뜸이었다는 것이 허명이 아니다. 고조는 매번 이곳을 지나가면서 제사가 끊이지 않고 받들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