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역사

조나라를 일으킨 조씨는 진()나라와 조상이 같다. 비렴에게 아들 두 명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 악래는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을 섬기다가 주나라에 의해서 피살되었으며, 진나라는 이 악래의 후손이 세웠고, 조씨는 악래의 아우 계승의 후손이다.

5대 주목왕 때에 조보(造父)가 명마의 생산지인 도림에서 도려, 화류, 녹이 등 명마 여덟 필을 구하여 왕에게 바치고, 왕의 수레를 몰았다. 최영이 지은 녹이상제 살지게 먹여라는 시조가 있는데, 이 시조에 등장하는 녹이상제가 바로 여기서 말하는 말 이름이다. 왕이 서쪽 지방을 순수하는데 서나라 언왕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들은 주목왕은 하루에 천리를 달려가 서나라 언왕을 공격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서나라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던 것은 명마 덕분이며, 명마를 잘 조련하여 수레를 몬 조보의 공이기도 하다. 왕은 조보의 공을 기려서 조성(趙城)을 하사하였고, 조보의 자손은 성 이름을 따서 조씨가 되었다.

12대 주유왕이 무도한 정치를 하자 조보의 자손 숙대(叔帶)는 주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서 진문후를 섬겼으며, 이로부터 진나라에 조씨 가문이 형성되었다.

()나라 19대 헌공은 곽, , 경 지역을 쳐서 국토를 확장하였는데, 이 때 조숙이 공이 있어서 경 지역을 봉지로 하사하였다.

조숙의 자손 조쇠(趙衰)가 공자 중이(重耳)를 섬겼다. 중이는 여희의 내란 때문에 적으로 도망갔는데, 조쇠도 따라갔다. 적나라에서 장구여를 공격하고 두 여자를 전리품으로 얻었는데, 그 중에서 어린 여자는 중이에게 시집보내고, 큰 여자는 조쇠에게 시집보내었다. 조쇠는 이 여인과의 사이에서 돈()을 낳았다. 중이를 따라 망명 생활을 하기 전 진나라에 있을 때 조쇠는 이미 아들 조동, 조괄, 조영제를 두었다. 망명생활 19년 만에 중이가 귀국하여 22대 진문공이 되고, 조쇠는 원을 봉지로 받고 국정을 맡았다. 진양공 6, 조쇠가 죽고, 조돈이 조쇠의 후계자가 되어 국정을 맡았으며, 진양공이 죽고 진영공이 즉위하면서 조돈은 더욱 국정을 전단하였다.

24대 진영공은 잔인하고 교만하여 조돈이 자주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진영공이 돈을 죽이려 하자, 돈이 도망을 가는데 국경을 넘기 전에 조돈의 아우 조천(趙穿)이 진영공을 시해하고 진성공을 옹립하였고, 조돈은 돌아와 다시 국정을 맡았다. 사가는 조돈이 군주를 시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국정을 책임진 사람이 도망하다가 국경을 넘지도 않았고, 군주가 시해된 뒤에 돌아와서는 군주를 시해한 자를 벌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조돈이 죽고 아들 삭()이 대를 이었는데, 진성공의 누이를 부인으로 삼았다.

26대 진경공 3, 사구 벼슬에 있는 도안고가 선대 군주 진영공을 시해한 책임을 물어 조삭을 죽이고, 조돈의 형제인 조동, 조괄, 조영제 등을 죽여 일족을 모두 멸하였는데, 당시 조삭의 아내는 임신한 몸으로 궁궐에 피신하여 목숨을 부지하였으며, 뒤에 조무(趙武)를 낳았다.

15년이 지나서 진경공은 한궐로부터 조삭의 후손이 살아있음을 알고 복권시키고 선대에서 소유했던 영지를 그대로 돌려주었다. 조무는 자신의 가문을 멸한 도안고를 공격하여 그 일족을 멸하였고, 진평공 12년에 정사를 맡았다.

조무는 경숙을 낳고 경숙은 조앙(趙鞅)을 낳았다. 앙의 시호는 간자(簡子)여서 조간자로 많이 알려져 있다. 조앙의 대를 이어 조무휼(趙毋卹)이 후계자가 되었다.

33대 진출공 17년에 조무휼은 북쪽의 대왕(代王)을 죽이고 그 땅을 소유하였다. 4년 뒤, 순요(荀瑤)는 조, , 위의 세 가문과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킨 범씨와 중항씨를 멸하고 그들이 소유했던 땅을 모두 나누어 가졌다. 반란 세력의 땅을 나라에 바친 것이 아니라 남은 4경이 나누어 가지니 격노한 진출공은 제나라, 노나라에 이 사실을 알리고, 4경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 사실을 안 4경이 진출공에게 반격을 가하니 진출공은 제나라로 도망가다가 길에서 죽었다. 순요는 30대 진소공의 증손 진의공을 옹립하였다. 자신의 손으로 군주를 교체한 순요는 더욱 교만하여 남은 3경에게 땅을 더 요구하였다. , 위 가문은 순요의 요구에 응했으나, 조무휼은 이 요구를 거절하였다. 화가 난 순요는 한, 위의 세력과 합세하여 조무휼의 진양성을 공격하였고, 공격에 대항한 조무휼은 1년 여를 버티다가 멸망 직전에 한, 위를 설득하여 함께 순요를 공격하여 멸하고 그 땅을 분배하였다. 이리하여 조, , 한의 소위 삼진이 진나라를 분할 통치하게 되니, 조나라가 군주국가로서 자리를 잡은 것은 조무휼로부터 시작된다. 조무휼의 시호는 양자(襄子)이다.

4대 조열후 6, , 한과 함께 주나라 왕실로부터 제후로 인정받는 작위를 받았으며, 선대 헌자는 헌후로 추존하였다.

5대 경후 원년, 처음으로 한단(邯鄲)에 도읍하였고, 11년에는 위, 한과 함께 명맥만 이어가던 진나라를 완전히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9대 조무령왕(趙武靈王)은 대부들을 설득하여 기마와 사격 훈련에 편리한 호복을 입게 했으며, 이렇게 군사를 훈련하여 26년에는 호전적인 중산을 공격하여 빼앗아 북쪽으로는 연나라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운중, 구원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하였다. 조무령왕은 장자 장을 태자로 삼았다가, 뒤에 오왜를 사랑하여 장자를 폐하고 오왜의 소생 하를 태자로 삼았다. 275월 무신일에 태자 하에게 왕위를 전하니 조혜문왕이다. 왕위에서 물러난 무령왕은 주부(主父)로 자처하였으며, 장자 장에게는 대()를 영지로 주고 안양군에 봉하였다. 조혜문왕 4, 안양군이 반란을 일으키자 여기에 휘말린 조무령왕은 3개월 동안 성안에 갇혀 지내다가 굶어죽었다.

조혜문왕 시절에는 강성한 진나라의 침공을 염파(廉頗) 악의(樂毅) 등의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여 나라를 잘 지켰다.

10대 조효성왕 원년, 새로 즉위한 군주가 나이가 어려 정사를 돌볼 수 없으므로 태후가 국사를 처리하니, 진나라가 이 틈을 이용하여 강렬하게 공격하였다. 조나라는 다급하여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니, 태후의 막내 장안군을 인질로 보내야 군사 지원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태후는 장안군을 위하여 수레 백승을 딸려서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제나라의 지원을 받아 진나라 공격을 막았다.

4, 한나라의 상당 태수 풍정이 사자를 보내어 한나라는 멸망 직전이니 상당을 진나라에 편입시키기보다는 조나라에 편입시키고 싶다고 하였다. 평양군 조표는 이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한사코 반대하였으나, 평원군 조승(趙勝)은 이를 찬성하여 왕은 상당의 17개를 받았다. 한나라를 공격하던 진나라는 조나라가 공을 가로채니 견딜 수 없었으나 염파가 지키고 있으니 속앓이를 하였다. 7, 장평을 지키고 있던 염파 장군이 면직되고 조괄(趙括)이 군사를 지휘하자 진나라는 대대적인 공격을 하여 장평을 함락하고, 진나라는 조나라 군사 40만을 생매장하였다. 8, 진나라가 한단을 포위하여 공격하자 평원군이 초나라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여 초나라 군사가 지원하고, 위나라 공자 신릉군 무기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구원하여 진나라가 물러갔다. 15, 염파를 상국에 임명하고 위문을 영지로 주었으며, 신평군에 봉하였다. 연나라가 율복을 장군으로 삼고 2군을 일으켜 전차 2천승을 몰고 조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염파가 이끄는 조나라 군사에게 패퇴당하고 장수 율복은 전사하였다. 20년에는 진시황 정()이 즉위하였다.

조효성왕이 죽고 조도양왕이 즉위하자 염파를 면직하고 낙승(樂乘)을 장군으로 삼으니, 격노한 염파가 낙승을 공격하여 낙승은 도주하고 염파는 위나라로 망명하였다. 조도양왕은 애첩의 농간에 놀아나 태자 가를 폐하고 애첩의 아들 천을 태자로 삼았다. 조도양왕이 죽고 조나라의 마지막 왕인 유목왕(幽繆王) ()이 즉위하였다. 염파가 망명한 뒤 이목(李牧)이 등장하여 위기 때마다 진나라의 침략을 잘 방어하였고, 나라에서는 이목을 무안군에 봉하였다. 5년에는 대 지역에 큰 지진이 일어나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고, 간신 곽개(郭開)의 모함으로 이목이 주살되자 조나라의 군사력은 급격히 쇠락하여 진나라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810월 조나라가 진나라에 멸망되었다.